[사찰벽화이야기] 수원 용주사 ‘이교취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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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벽화이야기] 수원 용주사 ‘이교취리도’
  • 강호진
  • 승인 2017.04.19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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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속에 그려진 신발 한 짝의 뜻

 

대웅전 속에 그려진 신발 한 짝의 뜻

수원 용주사 대웅전에는 설핏 보아도 불교와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은 그림이 내벽의 한 자리를 버젓이 차지하고 있다. 파초선芭蕉扇을 허리춤에 찬 신선풍의 노인이 긴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오른쪽 발을 앞으로 쑥 내밀고 있는데, 그 아래에서 붉은 옷을 입은 한 사내가 공손히 꿇어앉아 신발을 받쳐 든 모습이다. 노인의 오른편에는 흰 글씨로 ‘이교황석공圯橋黃石公’이란 화제畫題가 쓰여 있는데, 이교(흙다리) 위의 황석공을 그렸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림 속 이야기의 출전인 『사기』를 살펴보면, 주인공은 노인인 황석공이 아니라 신발을 받쳐 든 장량張良이란 인물임을 알게 된다. 『사기』 「유후세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장량은 한漢나라를 건국한 유방의 책사策士이자 개국공신으로 본디 한韓의 재상을 지낸 집안의 자제였다. 진시황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고 부친이 사망하자 장량은 자객을 구해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성과 이름을 바꾼 뒤 하비下邳로 가서 숨어 살았다. 어느 날 장량이 하비의 흙다리 위를 거닐고 있었는데, 거친 베옷을 입은 노인이 앞으로 걸어와 신발을 다리 아래로 떨어트리고선 “여보게, 내려가 신발을 주워오게나.” 하고 말했다. 장량은 화가 났지만 다리 아래로 내려가 신발을 주워와 내밀자 노인은 “내게 신발을 신기게.”라고 태연히 말했다. 장량은 이미 신발을 주워왔기에 무릎을 꿇고 노인에게 신발을 신겼다. 노인은 발을 뻗어 신을 신고는 “가르칠 만한 젊은이군. 닷새 뒤 여기서 다시 만나세.”라고 말하며 떠났다. 

닷새 뒤 장량이 이교에 갔을 때 노인은 이미 그곳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은 화를 내면서 닷새 뒤 아침에 다시 만나자고 말했다. 장량은 닷새 뒤 새벽부터 약속장소로 갔지만, 먼저 와있던 노인은 닷새 뒤에는 더 일찍 만나자고 말하며 사라졌다. 장량은 닷새 뒤 한밤이 되기 전부터 흙다리 위에서 노인을 기다렸다. 잠시 후 노인이 도착해 『태공병법서太公兵法書』를 장량에게 건네주면서 “이 책을 읽으면 왕의 스승이 될 것인데, 10년을 공부해야 흥할 것이다. 13년 후에 제수濟水 북쪽 곡성산穀城山 아래에서 누런 돌을 보거든 나란 것을 알아라.” 말하면서 사라졌다. 

위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어디일까? 어쩌면 많은 이들이 장량이 『태공병법서』라는 비서祕書를 손에 넣는 장면을 지목할지도 모르겠다. 무림의 최고수가 되는 비급祕笈을 얻기 위해 서로 속이고 죽이는 무협영화가 어디 한두 편이던가.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진경산수로 일가를 이룬 겸재 정선은 당시 고사인물도의 빈번한 소재였던, 장량이 황석공의 신발을 주워든 ‘이교취리圯橋取履’의 고답적 형식을 탈피해 아예 황석공이 장량에게 병법서를 전하는 장면을 ‘야수소서(夜授素書, 한밤에 『태공병법서』를 전하다)’란 화제로 그려냈다.

겸재의 『야수소서』에는 비급전수의 극적인 순간이 담겨 있지만, 이상하리만치 심심하고 매가리가 없다. 『야수소서』가 보는 이들에게 헛헛증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장량 일화에 담긴 근본적 맥락을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겸재의 그림에서 두 인물 사이를 있는 것은 『태공병법서』이다. 다시 말해 비법의 ‘전수’를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 인해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있어야 할 ‘만남’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 지니는 의미는 지식이나 기술의 전수를 통해 기존에 지닌 것을 강화하거나 새로운 것을 더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쌓아온 것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경험이자, 늘 밟아온 익숙한 길이 한 발자국도 떼기 힘든 미로로 변하는 기이한 사건이다. 이러한 만남이어야지만 배움의 길이 열리고, 다시 태어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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