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방랑기] 강화 마니산 정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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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방랑기] 강화 마니산 정수사
  • 이광이
  • 승인 2017.04.19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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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서서 기다리면 바다 멀리서 그리운 이가찾아오는 곳
사진 : 최배문

멈춰서서 기다리면 바다 멀리서 그리운 이가찾아오는 곳

강화 마니산 정수사 

 

‘숲길을 걷다가 다람쥐가 풀숲에 

개암 감추는 모습을 지켜볼 틈도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인생인가(What is this life?)’

영국 시인 헨리 데이비스는 그렇게 묻는다. 개암은 ‘nuts’를 옮긴 말이다. 도토리처럼 생겼지만, 밤 맛이 난다. ‘가던 길 멈춰 서서’라는 이 시의 다음 구절도 아름답다. ‘햇빛 눈부신 한낮,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인생이냐고 시는 그런 식으로 몇 차례 묻는다. 숲길을 걷다가 다람쥐를 지켜보거나,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은 쉬운 일처럼 보인다. 너무나 쉬운 일이어서 하찮거나 다음으로 미뤄도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매우 어렵다. 언제 그런 것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숲길을 걷다가 다람쥐가 도토리를 감추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걷는 소리를 먼저 듣고, 다람쥐는 내 눈에 띄기 전에 사라진다. 강물은 해가 비칠 때마다 반짝이지만, 그것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인다는 생각은 그냥 오지 않는다. 숲에서 다람쥐를 보기 위해서는 걸음을 멈춰야 한다. 둘이 맞닥뜨리기 한참 전부터 나무처럼 서서 기다려야 한다. 멈춤과 기다림이 다람쥐를 만나기 위한 조건이다. 사진가가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눈꽃을 찍기 위해 겨울 새벽 상고대에서 덜덜 떨며 일출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조건이다. 멈추는 것은 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가다가 멈출 수 있는 것은 가는 값과 멈추는 값이 같아야 가능하다. 오늘 산의 정상까지 오른다거나, 호수를 세 바퀴 돌아야 한다면 멈출 수 없다. 그 목적을 향해 가야 하고, 다람쥐는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을 멈출 때 비로소 몸이 멈춘다. 틱낫한 스님이 말한 ‘목적 없음(aimlessness)’! 목적이 사라져야 멈출 수 있다. 다람쥐는 그제야 나타날 것이다. 숲길을 걷다가 가만히 멈춰 서서 다람쥐가 도토리를 감추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여유를 갖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시인은 ‘그것이 무슨 인생이냐?’고, 그만한 일에 인생을 통째로 걸고 따져 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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