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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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
  • 남지심
  • 승인 2016.09.2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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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불교출판문화상 '올해의 불서 10'
명성
저작·역자 남지심, 정가 17,000원
출간일 2016-09-20 분야 문학
책정보 한국 비구니 역사의 산증인. 비구니계의 큰 별, 명성 스님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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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불교출판문화상 '올해의 불서 10' 선정도서
 
한국 비구니 역사의 산증인
비구니계의 큰 별, 명성 스님 일대기!


청도 운문사를 한국을 대표하는 비구니 교육 도량으로 일궈낸 명성 스님의 일대기 《명성》이 불광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비구니 교단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비구니의 계맥과 명성 스님이 일군 운문사에 대한 찬사가 늘어가고 있다. 명성 스님의 유발상좌로 30여 년 스님을 가까이에서 바라본 《우담바라》의 작가 남지심이 비구니계의 큰 스승 명성 스님의 발자취를 평전소설로 꾸몄다. 명성 스님이 생존해 계시고, 책 속에 생을 정리해 놓은 자료들이 많아서 평전 쪽에 가깝다. 이 책은 한국 비구니사를 연구하는 데 활용해도 도움이 될 만하다.
《명성》은 명성 스님의 수행자, 교육자, 행정가, 지도자로서의 다양한 면모를 조명하였다. 그러나 단순히 명성 스님의 개인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스님의 생 자체가 한국 근현대 불교사의 산증인으로서 한국 비구니 역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명성》은 우리나라 삼국 시대부터 해방 후 ‘불교 정화 운동’까지 한국 불교사에 대해 생생하게 다루고 있어 역사의 현장을 보는 듯하다. 또한 부처님 재세 시 비구니 교단 스님들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중국, 인도, 남방권 불교국가의 비구니계 역사와 현 상황까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한국 비구니사는 물론, 세계 비구니사를 꿰뚫게 될 것이다.
명성 스님은 폐허와 다름없던 운문사에 와서 40여 년간 운문사 강원을 세계에 드러내도 손색이 없는 운문승가대학으로 탈바꿈시키고, 선원, 율원을 갖춘 대가람으로 일으키기까지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 힘겹고 드라마틱한 여정을 있는 그대로 작가가 섬세한 필체로 그려낸 《명성》은 마치 한 편의 장엄한 교향곡을 들은 듯 감동을 안겨준다.
《명성》에서 운문사 학인들의 생활 모습을 빼놓을 수 없다. 먹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농사짓던 이야기, 사교반 집단 탈출 사건, 감 서리 갔다가 사달이 난 이야기, 간담을 서늘하게 한 화재 사건 등 학인들과의 재미있는 일화들은 절로 웃음 짓게 한다. 매사에 철두철미한 스님이지만 학인들을 포근히 감싸주는 어머니 같은 모습은 가슴 찡하게 한다.
그 밖에 명성 스님의 수행 이야기에는 각 사찰의 창건 설화, 관세음보살 전생 이야기, 스님들의 일화 등이 녹아 있어 읽을거리가 다양하고 흥미롭다.
저자소개 위로
명성 스님의 유발상좌로서, 30년 전부터 더해진 깊은 흠모의 마음을 한 권의 소설 《명성》에 담았다.
강릉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했다. 1980년 장편공모에 <솔바람 물결소리>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화엄만다라를 그리듯 특유의 섬세하고 종교적인 시선으로 모든 등장인물이 주인공이 되는 글을 써 오고 있다.
주요 작품집으로는 《우담바라》(전4권), 《연꽃을 피운 돌》, 《한암》, 《담무갈》(전4권), 《청화 큰스님》(전2권), 《욕심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새벽하늘에 향 하나를 피우고》 등이 있다. 대표작인 《우담바라》는 총 600만 권이 팔린 밀리언셀러로, 불교를 세상에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목차 위로
1장 어렴풋한 아버지의 얼굴
2장 오대산 품 안에서 자란 산골 소녀
3장 명성아, 작은 소리로 읽어라
4장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는 길
5장 호거산 자락에 부는 새 바람
6장 부처님, 저는 지금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7장 꺼지지 않는 법등
8장 즉사이진(卽事而眞), 매사에 진실하라
9장 끊어졌던 강맥을 복원시키다
10장 복은 준비된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11장 가장 아름다운 만남
12장 부처님의 딸
13장 공덕의 숲, 화엄동산
명성 스님 행장 및 연보
상세소개 위로
‘비구니 교육’이란 시대적 짐을 짊어지고
승가 교육에 새 바람을 일으킨 큰 스승

명성 스님은 1930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출생. 1952년 합천 해인사 국일암에서 선행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23세 되던 해 아버지 관응 스님이 출가의 길을 권유했다.(관응 스님은 유식학의 대가로 당대 최고의 강백이었고 최초로 무문관에서 6년간 수행을 마친 선승으로 존경받았다. 2004년 입적하였다.)
1970년 40세 때 명성 스님이 운문사 강원에 강주로 왔을 당시만 해도 강원 교육은 서당에서 훈장이 가르치는 방법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명성 스님은 전형적인 주입식 교육의 틀을 깨고 모든 수업을 논강식 교육 방법으로 바꾸었다. 또한 절집 공부만으로는 안 된다고 여기고 외학(外典)과의 연계성을 강조하였다. 미술, 외국어, 심리학, 철학, 유학, 다도, 꽃꽂이, 피아노, 서예 등을 교과목에 넣었다. 그 당시 경상북도 산골에서 이런 교육을 한다는 것은 시대를 앞서 간 획기적인 일이었다. 절에 들어오면 여성성을 제거하고 남성을 닮은 중성이기를 강요하던 시절에 명성 스님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을 살려 포교에 매진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고 역설했으니! 승가 교육 현장에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부승 제도를 복원하여
한국 비구니사(史)에 한 획을 그은 비구니계의 등불

명성 스님은 비구와 비구니는 다 같은 부처님의 제자로 그 위상이 대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로 비구니가 비구니로부터 전강을 받는 전통을 만들었다. 1983년 명성 스님은 평소 존경했던 화산당 수옥 스님에게 법제자로 위패 건당을 하면서 자신의 뿌리를 만들고(수옥 스님은 금룡 스님, 혜옥 스님과 함께 근대의 3대 비구니 강백 중 한 사람이다.), 1985년 두 제자 흥륜, 일진 스님에게 전강을 함으로써 기둥을 만든 것이다. 이 전강 의식은 비구니 손으로 역사의 획을 긋는 의미 있는 사건으로 비구니사에 기록되었다. 비구니 강사가 배출되어 비구니를 직접 가르치는 여법한 이부승 제도가 되살아났으니, 끊어졌던 강맥을 복원시킨 명성 스님의 생은 그래서 더욱 빛난다.
비구니 위상이 높아지자 종단에서도 비구니가 비구니에게 직접 계를 주는 별소계단을 만들었다. 2001년부터 다시 구족계 별소계단이 만들어져, 이제 비구니스님은 비구스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국 불교 교단의 한 축을 감당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수많은 비구니스님들의 노고가 있었고, 그 중심에 명성 스님도 있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비구니스님들의 버팀목이자 거울
‘탁월한 불교 여성상(OWBA)’을 수상한 세계 불교계의 지도자

명성 스님은 1970년 운문사에 와서 방학 때가 되면 권선 순례에 나섰다. 환경이 너무 열악하여 학인들이 공부하는 데 필요한 체제를 갖추는 게 급선무였다. 스님은 70세가 되기까지 39동의 건물을 신축하고 10동의 건물을 보수하여 전국 최대 규모의 비구니 교육기관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는 가운데 40여 년 동안 2,000명의 비구니스님을 배출하였다.
벼룩 서 말은 끌고 갈 수 있어도 중 셋은 데리고 가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명성 스님은 자로 잰 듯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엄하게 교육하는 한편, 허물을 다 덮어주는 포근한 어머니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학인들 마음속에 명성 스님은 관세음보살처럼 자리하고 있다.
명성 스님은 육군사관학교에서 사경 법회를 주관하고, 논산훈련소 군법당에서 전계사로 3,500명의 현역 군인들에게 계를 주는 수계 의식을 치렀다. 비구니스님이 전계사가 되어 수천 명의 군인들에게 계를 준 것은 명성 스님이 처음으로 역사적인 일이었다. 이는 군 포교의 이정표가 되었다. 스님은 지금도 수계 법회를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명성 스님은 ‘법계장학회’와 ‘법륜비구니장학회’를 만들어 불교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도 힘쓰고 있다.
명성 스님은 2007년 조계종 명사 법계에 품서되어 불교계의 큰 어른으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UN ‘국제 여성의 날’을 맞아 ‘탁월한 불교 여성상’(OWBA)을 수상하는 등 세계 불교계의 지도자로 존경받고 있다.

작가는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은 존경할 수 있는 분을 만나는 일이라고. 많은 독자들이 명성 스님을 만나는 행복을 누리기를 빈다.
책속으로 위로
임호가 밥도 먹지 않고 울며 지내기를 사흘이 되던 날 저녁에 관응 스님은 임호 앞에 놓인 자퇴 용지를 자신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아픈 데가 있으면 아픈 부위를 의사한테 보여야지 숨기고 있으면 되겠느냐?”
임호는 스님의 말이, 음악회에 가고 싶으면 와서 당당히 말하고 가야지 그렇게 몰래 가면 되겠느냐는 말로 들렸다. 임호는 그 일을 통해 모든 일은 진실하고 솔직하게 거짓 없이 드러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51쪽

“내가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일인데 더 이상 끌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를 불렀다. 내 생각엔 네가 출가를 했으면 좋겠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관응 스님의 제안을 받은 임호는 어리둥절했다.
“사람들 앞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놓여 있는데 그중에서 출가 길보다 더 좋은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약 이 길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너한테 권하겠느냐?”
스님의 뜻을 안 임호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64쪽

강주로 있던 경봉 스님도 명성, 묘엄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이며 두 비구니를 강사로 키우려고 애썼다. 그래서 명성이 수업 중에 경을 크게 읽으면 이렇게 야단을 쳤다.
“명성아, 작은 소리로 읽어라. 평생 써 먹을 목청을 그렇게 함부로 쓰면 되느냐?”
평생 써 먹을 목청이라는 말 속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명성의 앞날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p.97

하얀 김을 뿜고 있는 놋대야를 바라보던 명성 스님 눈가가 붉어졌다. 자신을 위해 겨울이면 숯불 위에 놋대야를 올려놓고 세숫물을 데워 주던 어머니, 어머니와 동생은 이 추운 겨울에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힘없는 어머니와 힘없는 동생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을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 명성 스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103쪽

그러자 김동화 박사는 몹시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 학기부터 내가 강의하던 『원시불교』를 스님한테 주려고 했는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게 좋겠어요. 시골에서 하는 공부는 서울에서 낮잠 자는 것과 같아요.”
김동화 박사의 말을 듣고 명성 스님은 이렇게 답했다.
“동국대학교 강의는 할 사람들이 많지만, 운문사 비구니 강원 강사는 할 사람이 없어요. 제가 가서 해야겠어요.”
명성 스님은 10년간의 서울 생활을 접고 1970년 운문사로 내려가 비구니 강원 강사가 되었다. -128쪽

“차 마시러 내 방에 와요.”
“과자 먹으러 내 방에 와요.”
“사탕 먹으러 내 방에 와요.”
“손수건 하나씩 줄게 내 방으로 와요.”
이렇게 해서 명성 스님은 마침내 학인들 입에서 ‘스님 생각이 옳은 것 같습니다. 저희들이 추진위원회를 조직해서 스님이 하시는 일을 돕겠습니다.’라는 답을 얻어 냈다. -225쪽

이렇게 해서 전강 의식은 끝났다. 명성 스님은 비구니 강사인 수옥 스님에게 위패 건당을 하면서 자신의 뿌리를 만들었고, 이제 두 제자에게 전강을 함으로써 기둥을 만들었다. 앞으로 수많은 비구니 강사들이 배출돼서 각각 가지와 잎을 만들어 갈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나무 가득 꽃을 피우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열매를 세세생생 맺어 갈 것이다. 1985년 운문사 강원에서 이루어진 제1차 전강 의식은 참으로 의미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238쪽

그동안 몇 번 운문사로 돌아와 공무를 보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했지만 명성 스님은 추운 겨울을 권선 순례로 보냈다.
그렇게 권선을 마치고 운문사로 돌아온 날 저녁, 명성 스님 입에서 어금니 두 개가 빠졌다. 이 사실을 누가 알까? 함께 살고 있는 시자스님은 알았을까?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명성 스님은 자신의 입에서 어금니 두 개가 빠져 나갈 만큼 힘들었음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음으로……. -253쪽

환갑이 되던 해에 무문관에 들어가서 6년 만에 나왔으니 그때 관응 스님은 60대 중반이었다. 하얗게 긴 수염을 한 관응 스님이 무문관 문을 열고 나오자 불자들 1천여 명이 존경의 마음을 가득 담고서 눈물을 흘리며 스님을 맞았다. 그때의 자랑스러움이란! 명성 스님은 대중 뒤에 숨어서 조용히 관응 스님의 모습을 지켜보았지만 딸로서의 자랑스러움을 숨길 수는 없었다. -288쪽

“회주스님은 당신이 한 일(업적)에 대해 굉장히 집착하고 계실 것 같은데 실제는 그렇지 않으세요. 일단 마무리한 일이 당신 손에서 떠나면 그 순간 머릿속에서도 그 일이 떠나는 것 같아요.”
명성 스님은 항상 1%의 지시와 99%의 확인이라고 말한다. 이게 스님이 일을 처리해 온 방식이다. -3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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