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인터뷰] 불교를 철학하는 수행자, 해강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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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인터뷰] 불교를 철학하는 수행자, 해강 스님
  • 김성동
  • 승인 2017.01.09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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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철학하는 수행자, 해강 스님

“취재거리가 없나 봐요. 이 산골에 나 같은사람 만나러 오고요.”(웃음)

해강 스님(54)은 너털웃음으로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실상사를 오른쪽으로 끼고 3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실상사 산내 암자인 약수암이 보인다. 요사채와 작은 보광전. 마당에는 밭을 일구었는지 작은 두렁들이 객을 맞이한다. 햇수로 4년째, 더 오래전 머문 것까지 합하면 10년이다. 약수암에는 스님과 한 분이 더 있다. 스님의 노모老母이시다. 밖에서 보면 스님이 노모를 모시는 듯하지만, 열다섯에 출가해 따뜻한 밥 한 끼 살갑게 주지 못했던 어미의 간청으로 함께 머물게 되었다. 출가는 새로운 인연을 지어나가는 것이지만, 옛 인연도 업이 되어 따라오는 것인가. 스님은 “이제 4년이 지났으니 그 청은 대략 갚은 것 같다.”고 했다.

해강 스님은 불교계에서는 낯선 분이다. 94년 실상사 내 승가대학원 격인 화림원 생활을 시작으로 근 20여 년 실상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실상사와 인연 있는 이들은 알고 있다. 번역과 이해가 어렵기로 손꼽히는 『조론肇論』을 강의할 정도로 경전을 바라보는 안목이 남다르며, 불교계 고등 교육기관인 ‘화림원’과 ‘화엄학림’을 이끌며 수행공동체, 교육공동체 실험을 해왔다는 것을. 수줍고, 사교성이 없고, 아는 반연도 별로 없는 스님은 2015년부터 쌍계사 율학승가대학원장 소임을 맡으면서 때때로 외부에 나가 발언도 하게 됐다.

 

| 스물두 살에 참선을 그만뒀다

1978년 중학교 3학년에 서울 도봉산 망월사로 출가, 열여섯부터 수계 받고 그다음 해부터 선방을 찾아 다녔다. 지금은 10대 수좌가 거의 드물지만, 당시에 10대 수좌는 꽤 있었다. 때로 부여 화산 석굴암에서는 겨울을 홀로 났고, 대둔산 안심사 너머 빈집을 토굴 삼아 참선하며 살기도 했다. 그렇게 참선 공부를 이어가자 이전에 읽으면 이해되지 않았던 조사어록이 술술 읽히고 이해가 되었다. 한참 환희심이 일어났다.

“어느 날 갑자기 탁 막히고, 깜깜해졌어요. 입술이 부르트고, 머리 뒤쪽에 팥죽처럼 뾰루지들이 올라왔는데, 상기죠. 대개 수좌들이 겪는데, 은산철벽 같은 날이 계속되었어요.”

구참 수좌에게 물어봐도 풀리지 않았다. 제방의 큰스님들을 찾아다녔지만, 의문만 쌓였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내가 답답하고 막혀 있던 그 증세, 그것은 초보 수좌들의 일반적인 병통이었다. 이 현상을 환자에 비유하면, 매우 일반적인 증세다. 조실, 방장스님들이 이런 일반적이고 초보적인 병통조차 환자가 증세의 호전을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처방을 해주지 못했다.

“마치 꼭대기에서 손을 내밀면서 손을 잡으라고 합니다. 나는 손을 잡을 힘이 없는데. 그렇다면 그 손은 나에게 아무런 역할을 못하죠. 그 손을 잡을 힘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 손이 큰 가치가 있지만, 나에게는 가치가 없는 셈이었죠.”

스물두 살에 참선을 그만뒀다. 절 뒷방을 돌아다니며, 손에 잡히는 책을 읽었다. 개심사에서 100일 기도 후 인도와 티베트로 갔다. 그곳에 가면 뭔가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였다. 인도와 티베트의 속살이 보고 싶었다. 인도 수행자와 티베트 큰스님들을 찾아뵙고, 궁금한 것을 여쭤보았다. 그분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사소하고 별것도 아닌 것을 아주 자상하게, 깊은 공감을 표현해주었다.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서 알려주었다. 또 본인이 답하기 어려우면 또 다른 스님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받아들일 때의 진지함, 이런 것이 한국의 큰스님과 달랐다. 적지 않은 위로가 됐다. 인도 수행자들의 공동체에 들어가서 함께 살기도 했다. 그렇게 3년을 보냈는데 결론은 이랬다. “이(한국) 집이나 저(인도) 집이나 앓고 있는 병이 비슷했어요. 인간이 살아가는 업습業習이 비슷하니까요. 그 당시 내 수준으로는 더 이상 인도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 티베트 불교는 어떠했나요?

“제가 경험한 티베트 불교는 귀족불교였어요. 소수 몇몇 하이클래스 승려들에게만 기회가 보장된 승가였어요.”

- 의외의 판단인데요. 우리에게 티베트 불교는 달라이 라마를 상징으로 호감이 높습니다.

티베트 불교에는 다른 나라 불교 승가가 갖지 못한 장점이 분명 있어요. 현재 티베트 전체 승가를 볼 때 하이클래스에 속하는 소수의 승려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승려들은 어떻게 중노릇을 해나가야 할 것인지, 고민이 없어요. 뭐 해먹고 살 것인지, 이런 고민만 있죠. 생계출가와 문화정서적인 출가가 많아요. 발심출가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지 출가생활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물론 티베트 불교는 상위계층에게 풍부한 기회가 되는 곳입니다.”

- 실상사와 어떻게 인연이 되었는가요?

“1994년 12월에 법인 스님(일지암)이 실상사 ‘화엄학림’이 종단 교육기관으로 공식 문을 열었으니, 함께 공부하자고 했어요. 당시 전 한문을 전혀 할 줄 몰랐는데, 법인 스님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번역본과 대조하면서 본다고 했죠. 공부를 시작했는데, 속았습니다.(웃음) 학장이며 유일한 강사분이 연관 스님이셨어요. 연관 스님이 공부할 책이라고 던져주었는데, 이두 토가 달린 목판본 『화엄현담』이었어요. 방에 들어와 한 페이지에 내가 아는 한자가 몇 개나 있는지 세어봤는데 열 개가 안 넘어요.”(웃음)

법인 스님, 입적한 고경 스님, 오경 스님, 오성 스님, 해강 스님 이렇게 다섯 명이 모였다. 해강 스님을 빼고는 다들 한문에 밝았고, 경학을 이해하는 안목이 높았다. 공부 방식은 전통식으로 했다. 다음에 공부할 것을 학인들끼리 모여 새기고, 다음날 학인이 강사 앞에서 읽고, 질문을 던진다. 당시 실상사 대중 스님들이 청강생으로 함께 했다. 공부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 그때 경을 바라보는 안목이 달라졌겠습니다.

“당연히 도움을 많이 받았죠. 제 차례가 돌아와 경을 새기면 나만 혼났습니다. 나는 강원에 가지 않았어요. 강원풍으로 경을 새기지 못했죠. 그러면 연관 스님이 그것은 그렇게 새기는 것이 아니다, 하고 꾸짖습니다. 그러면 저는 뜻이 틀렸습니까, 하고 물었죠. 제가 좀 달랑거리잖아요.(웃음) 연관 스님이 뜻은 맞는데 글을 새기는 방식이 틀렸다, 하셨죠. 제가 뜻을 알려고 보는 것이지, 새기는 방식을 보려고 합니까, 하기도 했죠.(웃음) 그렇게 6개월 정도 하니까 따라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 화엄학림, 화림원에서 공부한 것들

- 언제까지 이어졌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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