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병의 평화모니] 눈동냥과 귀동냥
상태바
[윤구병의 평화모니] 눈동냥과 귀동냥
  • 윤구병
  • 승인 2016.10.05 13: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눈동냥과 귀동냥 

‘동냥’이라는 말이 있다. 요즘 사람들은 잘 안 쓴다. 끼니거리가 없어서 배곯는 사람이 남의 집에 찾아가 먹을 것을 달라고 비는 짓을 일컬어 ‘동냥질’이라고 하고, 그러고 있는 사람을 ‘동냥아치’라고 했다. ‘비렁뱅이’, ‘거렁뱅이’라는 말은 더러 쓰인다. 요즘 말로 하면 거지다.

내 보기에 살아 있는 것 치고 동냥아치가 아닌 것이 없다. 꼴과 차림새에 따라 그 모습이 달리 나타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절집 스님들? 죄다 동냥아치다. 제 손으로 저 먹을 것 마련하지 않는다. 저 입을 것, 저 살 집 손수 짓지 않는다. 얻어 입고, 얻어 자고, 얻어먹는다. ‘가사’, ‘장삼’ 입은 동냥아치다. (꽃과 벌, 진딧물과 개미도 서로 동냥질하면서 산다는 말은 빼자. 잘못하면 ‘물타기’가 되기 십상이니까.)

국회의원, 판·검사, 대통령은 ‘표’를 동냥질한다. 온갖 차림새로 저를 뽑아주면 모두 잘 살게 만들어주겠다고 허리를 꺾고 손 비비고 있는 꼴을 보면 누더기 걸치고 품바로 얻어먹고 사는 거지들도 눈꼴이 실 게다. 왜 그런 짓을 부끄럼 없이 하는지는 너도 알고 나도 안다. 그렇게 해서 ‘되고 나면’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리뿐만 아니라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힘까지 생기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눈 쌓인 묏등에서 헐벗고 굶주린 모습으로 여러 해 ‘고행’해서 깨우침을 얻었다고, 대단한 일이라고 떠들어댄다. 석가로서는 대단한 일이다. 석가는 있는 집 ‘아들’이었다. (‘딸’도 아니었다.) 없는 것이 없는 곳에서 살았다. 고달픈 삶이 어떤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석가는 석가인지라 사서 고생을 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해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 사서 한 고생으로, ‘고행’으로 석가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부처가 되었다. 그런데 (잠깐 뜸들이고 나서) 부처님이 어느 자리에서 그런 말 입에 올리지 않았나? 이 세상이 고해苦海라고. 앓이로 가득 찬 아픔의 바다라고, 그 말 맞다. 멀리 눈 돌리지 않아도 된다. 굳이 깨달음을 얻지 않더라도 누구나 안다. 석가는 뒤늦게야 몸으로 겪으면서 깨우쳤을 뿐이다. 그 깨우침이 모두라면 나 같은 중생도 코흘리개 적에 이미 얻었다. 없는 놈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고행’을 한다. 달리 길이 없다.

중국불교와 인도불교가 다르다고, ‘소승’이 어떻고 ‘대승’이 어떻고, ‘선불교’가 어떻고 ‘초기불교’가 어떻고 저마다 떠들어댄다. 거개가 ‘구두선’이지만 더러 귀동냥할 말도 섞여 있다. 눈동냥한 배를 타고 아픔의 바다를 건너느냐, 귀동냥한 배로 저 언덕에 이르느냐, 콩이야 팥이야 따지고, 참선공부가 윗길이다, 경전공부가 앞서야 한다, 입씨름해봐야 태어나서 늙어 죽도록 ‘고행’을 하는, 그럴 수밖에 없는 뭇산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쇠귀에 대고 염불하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말이 나왔으니 이 늙은이도 말 좀 보태자. 

‘선불교’를 ‘중국불교’로 보고,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갈림길에 육조 혜능을 세우는 이들이 있다. 혜능과 석가는 어디가 무엇이 다른가? 거칠게 말하면 ‘없는 놈’과 ‘있는 놈’으로 가를 수 있다. 혜능은 석가와 달리 ‘없는 놈’이었다. 아비 없이 (왕이 아니더라도 아비는 아비노릇을 한다.) 홀어미 밑에서 자랐다. (예부터 홀어미는 혼자 살아남기 힘들었다.) 날마다 땔감 해서 팔아 홀어머니와 먹고 살아야 하는 놈이 어느 겨를에 글을 익힐 수 있었겠는가. 이 알거지 혜능이 어느 날 귀동냥을 한다. (그때 어미는 저승길을 떠나겠지.) ‘이렇게 고생고생하지 않아도 살 길이 있는데.’ ‘그런 길이 어디 있대유?’ ‘절집 찾아가 봐.’ 혜능은 그 길로 지게 벗어던지고 절집에 찾아간다. 그런데 찾아가 봤자다. 가보니 눈동냥으로 먹고 사는 중놈들이 버글버글한데, 이놈들 하는 꼬라지를 보니 부처님 말씀이 잔뜩 적혀 있는 ‘경전’에 코를 박고 있다. 그리고 떡이며 밥이며 반찬거리며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보살’들에게 그 ‘경전’에 적혀 있는 글 가운데 맞춤한 말을 골라 들려주면 고마워하면서 ‘스님, 초파일에 또 오겠슈.’ 넙죽 엎드려 절하는 꼴도 본다. 

아시다시피 혜능은 까막눈이다. (‘흰 것은 종이고 검은 것은 먹이로다.’) 눈동냥으로 먹고 살 길이 없다. 그걸 눈동냥아치들이 알고 나서 ‘넌 가서 방아나 찧어.’ 한다. 고생길이 곱빼기로 열린 것이다. 이놈의 디딜방아가 어찌나 무거운지 말라비틀어져 몸무게가 허깨비 같은 혜능이 아무리 힘을 주어도 들리지 않는다. 옆에 돌확이 보인다. 그걸 지고 나니 무게가 생긴다. (‘부용거사’는 돌확을 등에 진 불목하니라는 말인데, 이게 절집에서 부르는 혜능의 딴이름이었다고 한다.) 이 생고생을 해가면서 혜능은 부지런히 귀동냥을 한다.

그 다음은 여러분이 아는 대로다. 어느 날 오조 홍인이 ‘그동안 공부한 것을 써 바쳐라.’ 하니까 눈동냥으로 으뜸가는 신수가 ‘방장’실 담벼락에 제 딴엔 부끄러워서 몰래 써 붙였다는 이른바 ‘오도송’(깨달음의 노래).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