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 너머] 올여름, 그 뜨겁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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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너머] 올여름, 그 뜨겁던 반격
  • 최원형
  • 승인 2016.09.07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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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 소장

올여름, 서울의 폭염이 장기화 되자 일단 서울 탈출을 꿈꿨다. 탈출 심리의 기저에는 기후변화의 어두운 그림자가 도시를 덮치고 있다는 공포심도 한몫했다. 단 며칠이라도 그 그림자 바깥으로 달아나고 싶은 심경이었다. 어디로 갈까, 궁리 끝에 지리산 자락을 낙점했다. 지리산은 그 이름 석 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지리산으로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그곳의 자연을 생각하며 폭염을 견뎌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아직 그곳은 온전하겠지, 하는 마음이 얼마나 컸던지.

한여름에도 발이 시려 오래 담그지 못했던 계곡물이 아직 내 기억 속에 생생한데, 식어버린 목욕물마냥 미적지근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망치듯 피해왔던 그 어두운 그림자가 나보다 지리산에 먼저 당도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지리산마저’, 하는 두려움인지 분노인지 분간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으로 숙소에 도착했다.

‘000마을’로 명명된 그곳은 펜션이 십여 채 모여 있는데, 북유럽 어느 침엽수림을 배경으로 하는 마을 풍경이 떠오를 만큼 매우 이국적이었다. 앞마당은 잘 관리된 잔디가 깔려 있었다. 배정받은 숙소의 현관문을 열자마자 진한 나무 향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쳤다. 바닥, 벽, 천장에다 침대며 식탁까지 편백나무와 삼나무로 꽉 채워진 그곳은 바깥의 열기를 그대로 가두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나무 향은 더욱 진해진 것도 같았다. 멋스럽게 만든 창은 열기를 내보내기에는 전혀 효율적이지 못했다. 유러피언 스타일로 깔끔한 실내에는 그 흔한 선풍기 한 대 보이질 않았다. 에어컨을 켜지 않을 도리가 없었으니 지리산 골바람을 대신해서 더위를 식혀준 것은 문명의 이기, 에어컨이었다.

도시와 똑같은 폭염이었고 똑같은 에어컨 바람이었다. 출발할 때 들떴던 기분이 소금 절인 배추마냥 푹 가라앉을 무렵 창밖이 불그스레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해질 무렵이니 더위도 한풀 꺾였겠다 싶어 밖으로 나섰다. 금요일 저녁, 어둠이 내려앉으며 하나둘씩 여행객들이 도착했고 조용하던 펜션마을에는 시끌벅적함이 전등불빛과 함께 켜졌다.

저 멀리 건너편에 우뚝 솟은 왕시루봉은 해를 삼키고 별 하나를 봉우리 위에 걸어 놓았다. 사위가 온전히 어둠에 잠기자 별빛이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왕시루봉이 걸어뒀던 별은 점점 산마루로 기울더니 이내 꼴깍 넘어갔다. 그러곤 하늘에 별이 사라졌다. 점점이 반짝거리며 별들의 향연이 펼쳐질 걸 기대했는데 순간 당혹스러웠다. 아무리 습도가 높은 여름밤이라 해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맑은 날, 더구나 지리산에서 별을 만날 수 없을 거라는 건 선택지 밖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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