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말 잘 못합니다.”
조계종 노동위원 도철 스님께 전화를 드리니 잠깐의 틈을 두고 들려온 목소리다. 이 짧은 말도 느렸다. 말을 잘 못해서 인터뷰가 어렵다는 것이다. 질문을 하면, 단답형으로 답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대부분의 스님들이 그러하지만, 도철 스님은 더욱 그러했다. 작년 여름 광화문에서 세월호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32일간의 단식을 할 때에도 스님은 말이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손가락으로 “왜 여기에 중이 나서냐?” 힐난하기도 한다. 응답하지 않는다. 세월호 아이들만 생각했다. 그뿐이다.
| 선방 수좌에서 노동위원으로
- 절 살림이 쉽지 않겠습니다.
“입에 풀칠만 합니다.(웃음)”
“작년에는 한 달 중 초하루 외에는 잘 오지 못했습니다. 여기는 잠자러 들어오는 것 같았죠.”(웃음)
“저 없을 때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제 앞에서는 안 합니다. 이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뭐, 다 부처님일인데요. 이번 조계사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피신 때에도 그러더군요. 스님, 서울 조계사가 시끄러운데 왜 티비에 안 나와요?(웃음)”
“예. 조계사 관음전에서 함께 있었죠.”
“처음에는 놀랐습니다. 종단에서 노동위원회를 만든다고 해서요. 제대로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있었죠.”
- 왜 스님이었죠?
“아마도 제가 출가 전에 노동운동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 노동운동이요?
“아, 예, 이렇게 말하면 헌신적으로 노동운동하신 분들에게는 예의가 아니네요. 그냥 ‘잠시’ 했죠.”
스님은 90년부터 97년 출가 전까지 ‘잠시’ 철도청 노조활동 등 노동운동을 했다. 출가는 법주사로 했다. 출가 인연은 별스럽지 않다. 어릴 때부터 육식을 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절에 가면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청년 시절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막연히 절을 동경했다. 산을 좋아했다. 특별히 불교공부를 한 것도 아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도 없었다. 97년 가을, 산에 올랐다. 문득 출가를 해야겠다고 마음이 올라왔다. 그 길로 산을 내려와 곧바로 공중전화로 직장인 철도청에 전화했다. “나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습니다.” 그 길로 바로 법주사로 갔다. 서른여섯이다.
“특별한 것은 없어요. 익숙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종단에서 일하는 분이 과거 노동운동 시절 인연으로 저를 추천했어요. 전화 받고 그러마,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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