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책]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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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산책]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
  • 고병권
  • 승인 2015.11.06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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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라고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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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라고 하는 것(was ein Philosoph ist)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니체가 철학자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담아서 한 말이다. 어떤 지식이나 개념을 가르치듯 철학자라고 하는 것을 가르칠 수는 없다. 그것은 눈길과 발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삶을 어떻게 바라보며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가는가. 훌륭한 무용수가 혹독한 훈련을 통해 그 걸음걸이를 체득하듯이, 누군가를 철학자로 알아보게 하는 눈길과 발길은 삶에서 그렇게 단련된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당장에 가르칠 수 없고 그렇게 걷는 사람을 보여줄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mo).” 철학자를 누군가에게 알려주는 말은 딱 여기까지다.
 
 
변론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진실
최근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읽었을 때 나는 내가 읽은 것이 철학자임을 깨달았다. 이 유명한 재판의 결과는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패배했다. 그의 변론은 무죄선고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애당초 그는 말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변론을 시작하며 그는 자신이 “언변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말을 꾸밀 줄도, 논리를 정연하게 펼칠 줄도 몰랐다. 무엇보다 그는 법정에서 말하는 법을 몰랐다. 마치 낯선 고장에 온 이방인처럼 말투가 이상할 것이니 감안해 달라고 사정을 해야 할 정도였다. 심지어 그는 “제발 소동을 일으키지 말아 달라.”고 여러 차례 말했을 정도로 배심원단의 감정을 자주 긁었다. 그러니 말의 패배는 예정되어 있었다. 법정의 선고로서 그 승패를 가른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가 어떤 말을 했다면 그것은 승리를 위한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변론을 시작하자마자 그가 던진 다음 말은 의미심장하다. “고소인들 때문에 하마터면 제가 누구인지를 저 자신조차 잊어버릴 뻔 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다 읽었을 때에야 새삼 이 말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그는 변론을 통해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예고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철학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변론의 상당 부분을 직접 아니토스와 멜레토스를 논박하는 데 할애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무죄를 위해서라면 ‘눈앞의 기소자들’에 대한 논박에 집중하는 것이 나았을 텐데도 말이다. 그 대신 그는 이상한 말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 재판에 ‘이중의 고발인들’이 있다고, 다시 말해서 아니토스와 멜레토스 말고 익명의 기소자들이 있다고 했다. 그가 ‘아니토스 무리보다 훨씬 두려운’ 존재들이라고 부른 이 익명의 기소자들은 다름 아닌 대중이었다. 철학자에 대해 편견을 가진 대중들 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 대한 재판을 두 개로 만들었다. 한편에는 아니토스 등의 기소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대중들의 기소가 있다. 그러나 두 개의 재판이라고 했지만 소크라테스가 초점을 맞춘 것은 명백히 후자였다. 그는 아니토스 등의 기소에 따른 유무죄 판결도 결국에는 철학자에 대한 대중의 편견에 기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줄곧, 심지어 멜레토스나 아니토스에 대한 반대신문을 진행할 때조차, 눈앞에 없는 기소자인 대중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의 표현을 빌면 “아무도 이리로 출두시킬 수도 없고, 신문할 수도 없으며, 마치 그림자를 상대로 싸우듯 변론을 해야 하고, 누구 하나 대답해주는 사람도 없이 신문해야 하는” 그런 재판이었다.
 
 
| 죽음은 조금도 내 관심사가 아니다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재판을 이중화하면서 거기에 있는 배심원단이 진정한 재판관이 될 수 없음을 드러냈다. 배심원단은 아니토스의 기소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유무죄를 판결하겠지만 철학자에 대한 대중의 기소에서는 재판관 역할을 할 수가 없다. 소크라테스가 이들을 관례적인 호칭인 “재판관 여러분”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아테네인 여러분”이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철학자에 대한 편견과 비방을 공유하는 한에서 배심원단은 ‘올바름’에 대한 재판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단을 향해 “멜레토스의 말을 따르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자극했고,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배심원단, 즉 법정의 판관들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았음을 환기시켰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하기 이전에 이미 이런 태도에서 그가 누구인지, 철학자란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난다. 철학자는 법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다. 범법 여부, 유무죄 여부가 철학자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대신 철학자는 올바름을 따른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유죄 판결이 아니라 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과거 정권 아래서 자신에게 내려진 부당한 명령을 목숨을 걸고 어겼던 일을 환기시키며 배심원단에게 말했다. “죽음은 조금도 내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 어떤 올바르지 못한 짓도, 그 어떤 불경한 짓도 행하지 않는다는 것…. 이를 저는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써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정권이 곧바로 무너졌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지속되었다면 그는 명령불복종으로 처형되었을 것이다. ‘올바름만을 따른다는 것’, ‘말이 아니라 행동’, ‘보여줌’, 이 모든 것들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준다.
 
그런데 여기서 철학자가 따르는 ‘올바름’이란 세상의 사물들에 대한 정확하고 방대한 지식을 말하는 게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점에서 철학자에 대한 대중의 기소장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철학자는 ‘땅 밑과 하늘 위를 탐구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것을 안다고 ‘주제넘게’ 나서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대중의 기소장에 담긴 그런 지식, 그러니까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는 그런 지혜’를 가졌다고 자처한 사람들은 오히려 소피스테스라고 했다. 그러면서 소크라테스 자신은 ‘지혜를 가진 자’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자’이며, 굳이 지혜를 가졌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는 지혜가 없다는 것, 즉 자신은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 “이 사람을 보라(Ecce hommo).”
아주 재밌는 말이다. 철학자란 ‘지혜를 가진 자’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는 것 말이다(그는 철학을 ‘필로소포스’, 즉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철학자로서의 삶이란 ‘지혜를 아는 삶’이라기보다 ‘지혜를 사랑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란, 우리 모두 잘 알듯이, 그 대상을 향해 끊임없이 이끌리는 일이다. 이 과정이 그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진리의 소유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이끌림과 다가감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삶의 변화, 참되고 올바른 것에 대한 마음 씀을 통해서 자기 삶을 아름답게 가꾸고 변형시키는 일, 그것이 철학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소크라테스가 생애 처음 서야했던 법정에서 한 일은 특별한 게 아니었다. 그가 변론 중에 한 일은 재판을 받기 전에도 해왔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혜를 소유했다고 믿는 이들, 그래서 지혜에 대한 사랑을 멈춘 이들의 지혜를 계속해서 캐묻고 검사했다. 그는 등에처럼 달라붙어 그들을 못살게 굴었다. 비유컨대 그는 사람들의 편안한 잠을 방해했다. 여기서 생겨난 미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재판정에 서게 했다. 그런데 그는 재판 중에도 그랬다. 그의 계속되는 캐물음과 비타협적 태도는 배심원단의 미움을 샀고 종국에는 사형선고로 이어졌다. 하지만 사형선고 후에도 변한 것은 없었다. 그는 판결 이후의 어수선한 순간조차 놓치지 않았다. 그는 죽으러 갈 때까지는 잠시 시간이 남았다며 자신을 지지해준 사람들을 붙잡았다.
 
독배를 들던 순간에도 그랬다. 그는 제자들에게 철학적 삶, 다시 말해 참되고 올바른 것에 마음을 쓰며 자기 자신을 돌보는 삶은 영원하며 죽음에 의해 단절되지 않는다는 점을 납득시키는 데 온 시간을 다 보냈다. 독배를 들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겨진 이들에게 따로 지시할 것이 없느냐는 친구 크리톤의 말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늘 내가 말하는 바로 그것들일세! 더 이상 새로울 건 아무 것도 없으이. 자네들이 자네들 자신을 돌본다면, 자네들이 뭘 하든, 자네들은 나를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도, 자네들 자신을 위해서도 기쁜 일을 하는 것일세.”
 
철학자란, 그러니까, 이런 유형의 사람이다!   
 
고병권
현장 인문학자.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철학을 공부하는 목적이 ‘박식함’에 있지 않고 ‘일깨움’에 있다고 말한다. 연구공동체 ‘수유너머R’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생각한다는 것』,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언더그라운드 니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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