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경寫經
한 자 한 자 쓰면서 환하게 경계가 열린다
2,500여 년 전, 부처님의 깨달음이 있었다. 이후로 부처님은 45년간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깨달은 세상의 진리, 법法을 펼치셨다.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 법을 따라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2,500여 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넘어 부처님의 법이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사경寫經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이 귀하던 시절, 사경은 불경을 널리 보급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불법승 삼보 가운데, 법이 없다면 불교의 의미 또한 사라집니다. 사경은 법이 전해지고 보존되어온 근간이라고 할 수 있죠. 불상이나 탑 안에 사경한 경전을 넣는 것 또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경전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대신하는 법사리法舍利가 되는 것입니다.”
전통 사경의 계승과 복원을 위해 외길을 걷고 있는 김경호 명예회장(한국사경연구회)의 말이다.
“신라시대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름답게 장엄하기 위해 ‘사경원’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경을 하는 사람뿐 아니라 종이 만드는 사람, 붓 만드는 사람, 표구하는 사람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냈죠. 먹물이 아니라 금가루와 은가루를 사용했어요. 신라 말 경순왕은 사경원에 가서 직접 사경을 하기도 했습니다.”
종이가 흔해지고 책이 많이 만들어지면서 사경이 아니더라도 부처님의 법을 찾아 읽고 배울 방법은 많아졌다. 그래서인지 그 옛날만큼 사경 수행이 널리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 김 회장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사경을 할 때는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합니다. 첫째 몸 청정, 둘째 마음 청정, 셋째 재료와 도구의 청정입니다. 마음의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은 사경을 하는 과정에서 다 녹아집니다. 사경을 다 끝내고 난 후의 공덕이라든가, 바라는 마음은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한 자 한 자 쓰는 과정에서 환하게 경계가 열리게 됩니다. 경계가 열리면 망상이 노는 게 훤히 보이죠. 그래도 그 망상이 일념삼매의 힘을 침범하지 못합니다.”
눈으로 보고, 입으로 독송을 하며 귀로 듣고, 손으로 쓰며 마음으로 새기는 사경은 육근을 총동원하는 수행이다. 그런 만큼 망상이 들어올 틈이 없어 일념에 들기가 어렵지 않다고 한다. 물론 사경을 하는 과정 속에서 망상이 펼쳐지기도 하지만, 마음의 경계가 열림과 동시에 집중을 방해하진 못한다. 시냇물에 물고기가 놀아도 물이 흐려지지 않는 것과 같다. 김경호 회장은 사경을 하는 중에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진정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여법하게 사경을 해야 합니다. 영험을 바라는 것은 외도이지 정법이 아니에요. 먼저 과거에 사경을 통해 법을 전해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불자님들이 사경 수행을 통해 지혜를 밝혀 가시길 기원합니다.”
| 사경 30년, 모든 삶의 결을 바꾸다
한낮의 기온이 34도를 육박하던 한여름의 어느 날, 사경을 통해 지혜를 밝히고 있는 수행자를 만나러 경기도 군포를 찾았다. 올해 여든 일곱의 안순심 보살. 낯선 객을 기다리며 반쯤 열어놓은 아파트 문 사이로 사경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희끗희끗한 머리가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는 있지만 화선지 위에 곧게 써내려간 글자는 여든 일곱의 나이를 무색하게 만든다. 작은 아파트 내부를 통과하던 바람이 먹의 향을 코끝으로 전한다.
“사경을 한 지는 근 30년이 됐어요. 뜻을 모르는 한자는 옥편을 찾아가며 쓰지요. 1년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아요. 많이 쓸 때는 하루 10시간도 쓰고, 시간이 부족하면 하루에 한 장이라도 꼭 씁니다. 절에 기도하러 들어갈 때도 도구를 가지고 가요. 지금은 법화경을 쓰고 있어요. 금강경도 많이 쓰고, 나이를 먹어 기운이 없어 고깃국이라도 끓여먹고 나면 동물들에게 미안해 자비도량참법을 쓰기도 합니다. 저에게 사경은 기도예요.”
안순심 보살은 사경을 통해 불법을 배우고 수행한 이야기로 대한불교조계종이 주최한 제2회 신행수기 공모에서 중앙신도회 회장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개신교 신자였던 보살의 삶은 마흔이 되던 해, 인생을 180도 바꾸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된다. “우연히 집 근처 서점에 가게 됐는데,『무소유』라는 책의 제목이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책 제목에 반해 바로 구입을 했어요. 지은이가 ‘법정’이라고만 되어 있어서 스님인지도 몰랐어요. 책의 내용에 너무 감명을 받아 서점에 가서 ‘법정’이란 사람이 지은 책을 모두 사들고 왔죠. 그때서야 ‘법정’이란 저자가 스님인 걸 알고는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불교와의 인연은 보살을 수행의 길로 이끌었다. 짧지 않은 인생의 여정을 걸어오면서 어려운 고비에 맞닥뜨릴 때마다 사경을 통해 번뇌를 내려놓고 부처님과 마주할 수 있었다.
“한 글자 쓰고 합장하며 ‘부처님 감사합니다’, 또 한 글자 쓰고 합장하며 ‘부처님 감사합니다’… 이 말만 했습니다.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침대 식탁을 펴고 사경을 했어요. 간병인에게 먹물을 따라 달라, 책장을 넘겨 달라 부탁을 했지요.”
그렇게 하루도 빼먹지 않고 사경한 결과물은 인연 있는 사찰에 보내 영가의 재를 지낼 때 사용하거나 탑에 보관한다.
“사경 수행을 하며 눈도 밝아져 15년 전부터는 책을 읽을 때도 안경을 쓰지 않아요. 고질병이었던 대상포진도 깨끗이 나았고….”
결과를 바라고 한 수행은 아니었지만 일심으로 믿는 만큼 부처님의 가피 또한 반드시 있다고 보살은 말한다. “처음 사경 수행을 시작하며 사경 도반 100명 만들기를 발원했는데, 현재 130여명의 도반이 생겼습니다. 부산에 사는 한 도반이 한지를 천 장이나 보내 줬어요. 한 장씩 6등분을 하니 6천 장이 되고, 6등분한 것을 또 반으로 자르니 만2천 장이 되더라고요. 다 쓰고 죽어야죠. 그러니 오늘도 부지런히 쓰고 있습니다.”
안순심 보살은 수의를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장기기증을 해놓았으니 쓸 만한 장기를 떼어내고 나면 화장을 하겠죠. 지금 사경하고 있는 법화경이 제 마지막 가는 길에 수의가 될 거예요.” 직접 자로 칸을 그리고 그 안에 반듯하게 써 내려간 글자들이 안순심 보살의 삶과 닮아있는 듯하다. 하심下心과 정진의 마음가짐이 한지 위에 부처님의 법을 담은 글자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취재를 마치고 현관을 나오는데, 보살이 덥석 손을 잡으며 마지막 말을 건넨다.
“믿음에 퀘스쳔question을 가지면 안 돼요. 100% 믿어야 합니다. 나는 늙고 가진 것도 없어 줄 거라곤 이 말밖에 없네요.”
사경으로 얻은 깊은 지혜의 말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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