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소유하고 더 많이 존재하라”
| 흔들림 없는 사자와 여기저기 움직이는 물고기
책장을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어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다. 책을 검색했더니 재고가 세 부였다. 내가 손에 쥔 것은 지난 해 7월 발행한 것으로 1판 39쇄였다. 1997년 발행한 이후 18년 동안 매년 2쇄 이상을 찍었으니 명실상부한 스테디셀러였다. 표지도 그대로였다. 40대를 코앞에 두고 있던 내가 이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간 첫 번째 이유는 크리슈나무르티 때문이었다. 대학교 2학년, 그러니까 1979년 늦가을에 크리슈나무르티를 처음 접했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정현종 시인이 번역한 책이어서 더 각별했다.
문학에 막 한 발을 들여놓고 있던 나에게 ‘내적 혁명’이 삶의 궁극적 목표라는 크리슈나무르티의 메시지는 매혹적이었다. ‘아는 것’도 없고 ‘자유’는 더더욱 없던 시절, 나는 내 안과 밖이 잘 보이지 않아 혼란스럽기만 했다. 1980년대와 겹쳐있던 나의 20대는 양 극단 사이를 오갔다. 한쪽에는 크리슈나무르티와 라즈니쉬, 다른 한쪽에는 박노해와 이산하. 나는 인도 신비주의와 리얼리즘 문학 사이에서 ‘몽유’하는 청춘이었다. 한심한 청춘은 30대로 접어들면서 저 캄캄한 시대를 애써 잊었다. 도시에서 소시민으로, 아니 소비자로 살아가기에 바빴다.
도시를 악의 정글이라고 규정하면서도 도시를 떠날 생각조차 못하던 30대 후반에 헬렌 니어링의 자전적 에세이를 만났다. 그런데 헬렌이 다름 아닌 크리슈나무르티의 연인이었다는 것이었다.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도입부에 둘의 만남과 이별이 상세했는데,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헬렌의 평가는 냉정하다. 한때 나를 흔들었던 ‘세계의 교사’는 두 얼굴을 갖고 있었다. 특히 귀족 취향이 너무 강했다. 하지만 이 책은 크리슈나무르티에 관한 책이 아니다. 그렇다고 헬렌의 자서전인 것만도 아니다.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헬렌의 동반자 스코트 니어링이다.
188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태어난 스코트는 진보적 경제학자이자 반전 평화주의자였다. 누구보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삶을 살다간 실천적 지식인이다. ‘땅에 뿌리박은 삶’의 모범을 보여준 20세기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였다. 스코트가 헬렌과 함께 참다운 삶의 가치와 의미를 구현한 버몬트와 메인의 농장이 곧 소로의 ‘월든’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닮은 점이 거의 없었다. 1920년대 후반에 만나 이후 50년을 함께 살아온 헬렌과 스코트는 가정환경, 성장 과정,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점이 다 달랐다. 스코트가 ‘흔들림 없는 사자’였다면 헬렌은 ‘여기저기 움직이는 물고기’와 같았다.
| 땅에 뿌리박은 삶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헬렌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7세 소녀였고, 스코트는 38세의 기혼남이었다. 헬렌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난 음악학도에다 신비주의 성향이 강한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반면 스코트는 대학 강단에서 쫓겨난 ‘문제인물’이었다. 미국 학계에서 거의 최초로 아동 노동을 문제 삼았으며, 자본주의 문명과 전쟁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비판을 가하던 재야 인사였다. 가족과도 결별 상태였다. 그야말로 바닥을 치던 시기에 헬렌을 만났다. 하지만 둘이 평생의 반려자가 되기 위해서는 7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 사이 헬렌은 크리슈나무르티 곁에 있었고, 스코트는 주류 사회 밖을 떠돌며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1920년대 후반, 스코트는 ‘구름 위에서 노닐던’ 헬렌을 뉴욕의 빈민가로 불러 공장에서 일하게 한다. 스코트의 ‘의식화 교육’이었다. 이후 헬렌은 스코트의 비서 겸 조수 역할을 담당한다. 스코트의 정치・현실이 헬렌의 예술・정신과 만난 것이다. 당시 스코트의 과업은 원대했다. 전쟁과 계급 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이론을 개발하고 세계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좌파 떠돌이 강사의 수입으로는 뉴욕에서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인류 구성원으로서 개인, 사회, 우주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자 했지만 입에 풀칠조차 하기 어려웠다.
두 사람은 1932년 뉴욕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버몬트 주의 오지로 들어간다. 이때부터 50년에 걸쳐 ‘땅에 뿌리박은 삶’을 실현한다. 손수 돌로 집을 짓고 씨앗을 뿌렸다. 단풍시럽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으며 기계와 대중매체를 멀리했다. 채식주의와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면서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율을 유지했다. 그러면서도 여유를 즐겼으며, 타인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잃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연과 우주에 대한 감성을 놓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농장은 늘 열려 있었다. 생태적 삶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스코트는 글쓰기와 간행물 발간에서 손을 떼지 않았고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마다하지 않았다.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라.” 스코트 자신이 평생 고수한 원칙이었다. 수입 안에서 생활하고, 얻은 것보다 덜 썼다. 스코트는 수도승에 가까웠다. 강연 여행을 떠나면 숙박비, 음식 메뉴 등을 일일이 기록했다. 단벌 신사에다 웬만하면 타지 않고 걸었다. 화려한 호텔에서는 절대 묵지 않았다. 강연료가 없는 경우도 있었고, 청중이 없을 때도 있었지만 마다하지 않았다. 농장으로 돌아오면 헬렌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은 단식했고 매년 열흘씩 단식했다. 1952년 메인 주로 농장을 옮긴 이후에도 두 사람의 삶의 방식과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 존재의 주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
헬렌의 기록은 스코트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압권을 이룬다. 스코트는 자신의 생을 스스로 설계하고 건축했듯이, 죽음도 자신이 완성하고 싶어했다. 자신의 죽음을 온전히 경험하기 위해 임종과 장례에 관한 지침(요망사항)을 미리 작성했다. ‘나는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정제,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 없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다. 조용함, 위엄, 이해, 기쁨과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나누기 바란다.’
스코트는 1983년 100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스스로 곡기를 끊었다. 그리고 100세 생일로부터 18일이 지난 8월 24일 아침, 조용히 눈을 감았다. 헬렌은 그 순간을 이렇게 적었다. “그이는 단식으로 자기 몸을 벗고자 했다. …그 죽음은 느리고 품위 있는 에너지의 고갈이고, 평화롭게 떠나는 방법이자, 스스로 원한 것이었다. …나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갔음을 느꼈다.” 헬렌은 그 후 12년을 혼자 살다가 1995년 91세를 일기로 스코트의 뒤를 따랐다.
내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시의 슬럼프는 더 길어졌을 것이고, 나의 40대 또한 한층 곤고했을 것이다. 지난 십 수 년이 어떤 시기였던가. 산업 자본주의는 급기야 카지노 자본주의라는 괴물로 둔갑했고, 들과 산, 강과 바다가 도시의 노예로 전락하는 속도는 제어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국민, 시민, 주민, 개인은 죄다 소비자로 변신했다. 기업이 국가보다 커지고, 시장이 사회보다 거대해졌다. 결국 인간의 존엄, 지속가능한 문명은 사어死語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눈부신 타락’의 근본 원인은 자명하다. 우리가 땅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다.
내 시가 스코트의 삶에서 되찾은 것은 땅이다. 땅. 토지나 대지가 아닌 땅. 지구가 곧 땅이다. 지구는 오직 땅이다. 바다 또한 땅 위에 고인 물이다. 그렇다고 땅이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땅(지구)은 태양의 자녀이고, 태양은 우주의 형제다. 우리가 땅의 감수성, 즉 지구적 상상력을 회복하지 않는 한,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다. 소유를 우선하는 삶, 소비를 장려하는 사회는 더 나은 인간을 꿈꾸지 못한다. ‘돈의 논리’는 지구적 차원의 공생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스코트는 거듭 말했다. ‘덜 소유하고, 더 많이 존재하라.’ 존재의 주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자율성이다. 자율성이란 무엇인가. 자기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율성은 반드시 우주적 맥락과 만나 스스로 겸손해질 것이다.
이문재
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지금 여기가 맨 앞』 『제국호텔』 『마음의 오지』 『산책시편』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등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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