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한 현실을 바르게 아는 것이 열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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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한 현실을 바르게 아는 것이 열반이다
  • 불광출판사
  • 승인 2015.06.13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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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2)

홍길동이 태어났을까, 태어났으니 홍길동일까? 미운 놈을 피해야 할까, 피해야 할 미운 놈은 없는 것일까? ‘홍길동이 태어났다’는 말은 태어나기 전부터 홍길동이 있었다는 뜻이고, ‘태어났으니 홍길동이다’는 태어남을 통해 비로소 홍길동이 된다는 뜻이다. ‘미운 놈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확고하게 고정된 미운 놈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반면, ‘피해야 할 미운 놈은 없다’는 그런 고정된 미운 놈은 없다는 것이다.
두 가지 관점 가운데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행동도 달라지고 삶도 달라진다. 전자는 부파불교(설일체유부)의 사고방식이고, 후자는 대승불교의 사고방식이다. 두 사고방식 모두 ‘연기’라는 동일한 이름의 교리 아래에서 전개된 결과물이다. 왜 이처럼 차이가 나타나며, 어느 쪽을 따라야 할까? 

‘나’라고 불리는 것의 진상은 오온의 가화합일 뿐이다. 다시 말해, 색・수・상・행・식이라는 다섯 요소(오온)가 인연에 의해 임시적으로 조화롭게 결합되어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인연이 다하면 다섯 요소의 화합도 다하고 ‘나’도 없어진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요소 가운데 영원하며 변치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몸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기쁨도 잠깐이며 영원한 미움도 없다. 

이 오온이 가화합되어 있는 상태를 편의상 ‘나’라고 부를 뿐이다. 따라서 영원히 머무르며 변치 않는, 즉 상주불변常住不變의 ‘나’가 있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그와 같은 상주불변의 ‘나’는 없다는 것을 ‘무아無我’라고 한다.

『잡아함경』에 수레와 ‘나’의 대비를 통해 무아無我를 이해시키고자 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나온다.

여러 부속품을 조합한 것을       
세간에서 수레라 하는 것처럼,    
오온이 인연에 의해 화합한 것을  
임시로 ‘나(我)’라고 부른다.       
如和合衆材
世名之爲車
諸陰因緣合
假名爲衆生

바퀴・축・손잡이 등 여러 부품을 조립한 것을 두고 수레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부품들이 해체되면 수레도 없어진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것도 색・수・상・행・식의 다섯 요소가 인연에 의해 임시로 화합되어 있는 것에 붙여진 명칭에 불과하다. 인연이 다하여 이 다섯 요소가 흩어지면, 수레가 없어지듯이 ‘나’도 없어진다.

수레가 바퀴 등 여러 조건에 의존하여 생겨난 연기의 소산물이듯이, ‘나’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오온의 화합이라는 조건에 의존한 연기적 존재이며, 그 조건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상주불변의 ‘나’란 있을 수 없으므로 ‘무아’이다. 위의 게송이 보여 주고자 하는 이러한 내용은 초기불교시대부터 설해져 왔다.

그런데 이 설명을 이렇게 이해하면 어떻게 될까? 수레로 조립되기 전부터 바퀴・축 등의 부품은 이미 그대로 있었다. 수레를 해체해도 그 부품은 그대로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 각각은 ‘나’가 생기기 전에도 그대로 있었고, 없어진 뒤에도 그대로 있다.

문제는 수레와 부품의 관계는 위와 같이 생각할 수 있지만, ‘나’와 오온의 관계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몸과 이 감정이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사후에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인공물인 수레와는 달리,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은 그것이 있다고 하면 이미 누군가의 오온으로 있을 뿐, 누군가를 떠난 오온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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