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대담] 원택 스님과 지홍 스님이 만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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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대담] 원택 스님과 지홍 스님이 만나던 날
  • 정하중
  • 승인 2014.12.03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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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큰스님들이 그랬던 것처럼

| 오래 전 두 스님들에 대한 기억

사회 오늘 자리를 함께해주신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자리는 성철 스님과 광덕 스님, 두 큰스님들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보고 두 스님들께서 남긴 유산과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다시 살펴보자는 취지에서 마련됐습니다. 우선 큰스님들에 대한 예전 이야기들이 궁금합니다. 원택 스님께서는 광덕 스님을 처음 뵌 게 언젠가요? 그리고 두 분은 언제부터 가깝게 지내셨는지요?

원택 스님 1972년 1월에 백련암에 행자로 있었어요. 그때는 누가 다녀가셔도 행자에게 얘기를 해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잘 몰랐죠. 광덕 스님도 종종 다녀가셨을 테지요. 그런데도 잘 몰랐어요. 한참 후에 광덕 스님께서 학생들 200여 명을 데리고 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광덕 스님을 처음 뵀어요. 큰스님 심부름으로 종종 광덕 스님을 찾아뵐 기회도 많았는데, 그때 스님 곁에서 젊은 스님 하나가 바쁘게 오가는 모습을 보고 참 인상 깊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 스님이 지홍 스님 아니었을까 싶어요. 바쁘게 오가는 모습을 보면서 참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지홍 스님과 서로 가까워진 건 한참 후예요. 스님이 조계사 주지 소임을 맡던 시절이죠. 그때는 내가 총무원 총무부장을 하던 때였고요. 그때 비로소 우리가 동산 스님에게서 뻗어 나온 사촌지간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 당시 지홍 스님은 이미 종회의원으로 종단 대소사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었어요. 총무부장 소임을 하면서 지홍 스님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지홍 스님 난 스님 훼방 놓고 괴롭힌 기억밖에 없는데.(웃음) 그때가 1999년일 거예요. 스님과 친분을 맺기 전부터 난 성철 스님 상좌 원택 스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니까요. 성철 스님에 대해서는, 아마도 1970년대 중반쯤이었을 거예요. 광덕 스님을 모시고 백련암에 간 적이 있었어요. 당시는 제가 초상화를 한창 그릴 때였는데, 광덕 스님이 생전에 잘한다고 저를 인정해주신 게 딱 그거 한 가지였어요. 아마 성철 스님께서도 그 얘기를 들으셨는지 “내 초상화도 하나 그려주라. 너희 스님이 잘한다고 할 정도면 나를 그려도 되겠다.”고 하셨죠. 그때 뵀던 성철 스님은 어린이들을 참 좋아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여담인데, 원택 스님 1972년에 행자를 하셨다고요? 그럼 나한테는 후배네요. 내가 1970년에 출가했는데.

원택 스님 내가 뭐라고 했답니까?(일동 웃음) 두 큰스님을 돌이켜 떠올려보면, 참 막역한 사이였던 것 같아요. 성철 스님께서 큰일을 구상하시면 늘 광덕 스님께서 마스터플랜을 짜고 도장을 찍는 그런 역할을 하셨죠. 정말 큰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지홍 스님 광덕 스님이 어른스님들의 참모역할을 참 많이 하셨어요. 특히 석주 스님(전 조계종 총무원장)이 하시는 일은 항상 참모가 되어 도와주셨어요. 1970년대 초반 이후에 하셨던 일은 늘 그랬어요. 조계종의 총무부장 직함이 있든 없든 늘 종단의 중심으로 실무에 관여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시봉한다고 스님 곁에 올라와 있었죠. 종단의 종헌종법 체계도 거의 당신께서 초안을 잡으셨어요.

원택 스님 언젠가 광덕 스님이 그러셨어요. “내가 종단 일에 너무 오래 힘을 쏟았다. 잠실에 불광사를 하나 세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더 일찍 세간에 나와서 전법을 했어야 했다. 서울의 모든 구마다 불광을 세울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아직도 이거 하나밖에 못 했다.”고 하셨죠. 당시 이미 세납이 60세 중반이 넘으셨을 때예요. 항상 스님의 눈은 불광 밖의 세상까지 향해 있었어요.

지홍 스님 우리 스님께서 법상에 올라 하신 얘기가 있어요. “깨를 한 줌 쥐어서 확 뿌리면 곳곳에 퍼지듯이 전국에 전법의 거점을 만들어야 한다.” 서울은 기본적으로 동서남북을 나눠서 전법을 해야 한다는 게 스님의 생각이었어요. 예를 들어 지금의 잠실 법당은 동쪽, 남쪽은 동작구, 북쪽은 종로구 인근에 ‘불광’의 거점을 두고 전법을 해야 한다는 구상이셨죠. 그때 마음을 다잡으셨으면 아마 강서구 쪽에 ‘불광사’가 하나 더 생겼을 거예요.

| 피보다 진한 정을 나눴던 사형과 사제

사회 성철 스님께서 광덕 스님의 『지송보현행원품』 서문도 써주셨지요?

원택 스님 광덕 스님이 책을 쓰시면 꼭 스님께 가져오셨어요. 『지송보현행원품』에 대해서는 아마도 두 스님의 생각이 통했던 모양이에요. 성철 스님께서도 서문에 써놓으셨지만 『화엄경』 「보현행원품」은 불교의 정수라고 생각하고 계셨죠. 그런데 마침 광덕 스님이 그 책을 들고 와서 보여주셨어요. 성철 스님께서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서문을 써주셨지요. 그 뒤로 한 동안 백련암 신도들에게 늘 『지송보현행원품』을 나눠주곤 했어요.

현재의 한국불교가 이렇게 자리를 잡게 된 데에는 광덕 스님 공이 매우 커요. 그전에는 학자들도 비로자나불만 얘기했지, 보현보살은 언급하지 않았어요. 행원을 강조한 것도 모두 광덕 스님의 공입니다. 제가 광덕 스님께 감동받았던 일화가 있어요. 불광사 법당에 처음 왔을 때인데, 법당 입구 동판에 시주자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있더라고요. 성철 스님께서 “이걸 왜 이렇게 한 건지 이야기해 보라.”고 하셨어요. 광덕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제가 원을 세우길, 불광사를 지으며 한 사람이 많은 시주를 하는 걸 바라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작은 시주가 모여서 대중들의 힘으로 절이 세워지기를 바랐습니다.”라고 하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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