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경판에 스민 묵향墨香, 정법을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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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판에 스민 묵향墨香, 정법을 전하다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11.04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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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팔만대장경연구원 한홍익 전임연구원

결코 짧은 시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팔만대장경연구원 10년. 그 10년 간의 행보를 보면 ‘이 사람이 있기에 팔만대장경이 영원하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긴다. 불법佛法을 등불삼아 나라를 지키려는 염원을 담고 판각했다는 고려대장경판(국보 제 32호)과 장경판전(국보 제 52호)의 보존을 연구하고, 그 경판들을 가지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누구든 컴퓨터로 고려대장경을 마주할 수 있도록 도왔다. 경판을 인경印經하는 솜씨는 이미 해외에도 알려져 있다. 고려대장경 경판의 정법正法을 전하는 젊은이,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연구원 한홍익(34세) 전임연구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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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루에 담긴 송연먹 먹물을 먹솔에 찍어 경판을 쓸어내린다. 그 위에 잘 재단된 질기고 결 고운 한지 한 장을 살포시 얹어놓고, 비구니 스님의 무명초를 뭉쳐 만든 마력으로 종이 위를 몇 번 문지르니 반야바라밀다심경이 한지 위에 고르게 새겨진다. 전체의 과정이 물 흐르듯 매끄럽고 군더더기가 없다.
경판을 인경하는 태를 보니 2005년에 실시된 동·서사간전 고려사간판(국보 206호, 보물 734호) 인경불사의 최연소 인경공印經工이었고, 2012년 11월 일본 교토 불교대학 100주년 기념 국제 심포지엄에서 젊은 나이에 한국을 대표하는 인경공으로 초청받았다는 사실이 납득이 갔다.

| 부처님이 인도해준 대장경과의 인연
해인사 사하촌寺下村에서 자라 대학시절 건축과 푸드 스타일링을 전공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팔만대장경연구원의 연구원이 됐다. 그 연구원이 성장해 대장경판과 장경판전의 전반적인 보존 연구를 담당하게 되기까지, 대장경과의 인연은 마치 부처님 가르침이 불을 밝혀 길을 인도하듯 자연스레 이어졌다.
처음 대장경과의 인연은 남일 스님이 내민 손으로부터 시작됐다. “문화재는 그 지역 사람들이 직접 공부해서 가꿔야 한다.”, “마을에 있는 원석들을 키워내 그들이 널리 알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남일 스님이었다. 그런 스님의 손을 망설임 없이 덥석 잡았다. 2003년 그의 나이 겨우 스물 셋이었고, 당시 고려대장경연구소 보존실로 불리던 팔만대장경연구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
남일 스님이 그를 우물가에 데리고 왔다면 얼마 전 입적하신 성안 스님은 그에게 물을 마시게 해준 은사였다. 2010년에 보존국장으로 취임한 성안 스님은 팔만대장경연구원의 장기적인 발전계획을 세우고, 연구원들의 가능성을 발견해 재능을 키워주는 디딤돌을 자청했다. 직장상사와 연구원의 개념이 아닌 함께 커나가는 가족 같았고 끈끈한 유대감도 있었다.
“가족보다 더했어요. 스님과 재미난 일들이 참 많았죠. 다른 곳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은 적이 있어요. 이직할 생각도 없었는데 성안 스님이 그분에게 이렇게 말하셨대요. ‘홍익이는 나랑 평생 같이 갈 거다, 쟤한테는 그런 거 묻지도 마라’라고 말예요.”
두 스님의 손을 잡고 맺은 대장경과의 인연, 연구원이 된 후 강산이 한 번 변하는 동안 대장경판과 장경판전은 그의 20대 청춘의 전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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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02. 소나무뿌리 솔
경판에 먹을 묻힐 때 사용한다. 
너무 부드러워도, 억세도 경판에 먹을 묻히기 어렵다. 요즘에는 말총으로 만든 솔을 사용한다.

03. 마력
경판에 묻은 먹물이 한지에 잘 스며들도록 한지를 문지를 때 쓰는 도구. 목판의 글자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찍히기 위해서는 제대로 잘 만들어진 마력을 이용해야한다. 비구니 스님이 출가할 때 자른 깨끗하고 긴 머리카락을 모아 밀랍을 묻혀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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