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휘고 저리 굽어 아름다운 저 소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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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휘고 저리 굽어 아름다운 저 소나무처럼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11.04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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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구미 도리사 회주 법등 스님

철두철미徹頭徹尾. 열네 살 소년행자 법등法燈에게 어른 스님들이 가르친 도리였다. 시주물 하나 소홀하면 안 되었고 앉음새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50여 년. 원력이 이끌어온 길이었다. 진신사리 모셔진 도리사 성역화 불사와 조계종 종단개혁 20년사의 중심에 몸을 던졌다. 사사로이 자기를 돌보지 않은 대가는 혹독했다. 뼈를 깎고 폐를 잘라내는 수술을 견디며 생사의 기로岐路에서 아직 할 일이 남았음을 절감했다. 제12・13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장을 지낸 구미 도리사 회주 법등 스님의 원력 역정이다. 법등 스님이 소년행자 시절의 녹원 스님 시봉 이야기와 도리사 성역화 불사의 비화, 그리고 종단개혁 20년사의 소회를 풀어냈다. 

| 스승에게 물려받은 가장 귀한 재산
명분이 꺾이지 않게 일하라
나이 어린 법등 스님이 출가한 직지사에는 땅이 적었다. 소출이 적어 배를 곯기 일쑤였다. 늦여름, 새벽예불이 끝나면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을 주어다 남모르는 곳에 늘어놓고 배고플 때마다 가서 만져보았다. 말랑한 홍시가 되기까진 한참이 걸렸다. 봄가을로 수학여행 오는 아이들이 쌀을 가져왔다. 하룻밤 재우고 먹여 보내면 조금 남는 쌀로 하루 한 끼 밥을 해먹었고, 손톱 밑이 아리게 산수유를 까서 쌀을 바꿔다 살림을 살았다. 복원불사는 대중울력이었다. 삭은 기와를 내리고 새 기와를 올렸다. 몸은 고달파도 그렇게 살아 절맛이 났다. 대중살이의 뭉치는 힘이 든든해서 때때로 배고픔을 잊었다.
“원래는 고암 노스님 시봉 하려고 입산을 했거든요. 노장님이 나이 많다고 총무 스님한테 해라, 하십디다. 그래서 녹원 큰스님을 은사로 모셨지요. 처음 1년은 고암 노스님 시봉을 했는데 깜빡 잊고 밥을 덥히지 못한 것을 나무라지 않고 ‘내가 오늘 찬밥이 참 좋다.’ 이러세요. 어린 사람 마음을 보듬어 주신 줄도 모르고 찬밥을 또 갖다 드렸어요. 그랬더니 드시고 나서 ‘찬밥 한 번은 괜찮고 뜨신 밥을 해야 된다.’ 일러주셨어요. 참으로 자비의 화신이셨지요.”
고암 스님의 온화한 성품은 열네 살 법등 행자의 심지心地에 은은하게 스몄다. 그에 반해 은사 녹원 스님 성정은 잘 갈아놓은 칼날이었다. 종회 일로 조계사에 올라갈 때면 열차 안에 정좌해 눈썹 한 올 움직이지 않았다. 장장 일곱 시간 거리였다. 신도가 넣어준 곶감이 있었는데 “곶감 드릴까요?” 세 번을 거듭 청해도 은사 스님은 고개를 저어버렸다. “중이 이런 데서 뭘 먹고 그러면 안 된다.” 어른이 잡숫지 않으니 먹을 수 없었다. 
여름이면 빨래를 매일 삶아야 했다. 세숫대야에 비누를 풀어서 삼발이를 받쳐 불을 땠다. 삼발이가 작아서 땔나무를 일일이 칼로 쪼개야 하는데다 까딱 잘못하면 대야가 엎어지니 꾀가 나서 하루는 그냥 빨았다. 단박에 들통이 났다. 알고 보니 삶은 옷은 구수한 냄새가 나고 삶지 않은 옷은 비렸다. 엄밀하기가 바늘 끝 같은 녹원 스님에게 은근슬쩍 넘어가는 일이란 없었다. 그렇게 6년을 시봉 하는 동안 도망칠 마음이 딱 한 번 일었다. 공부가 하고 싶어서였다. 해인사 강원으로 가야겠다, 하고 신새벽에 짐을 꾸렸다.
“새벽예불 올리고는 걸어서 직지사역으로 갔어요. 도감스님이 자전거를 타고 뒤따라 와서는 절에 가자는 거예요. ‘저는 안 갑니다, 해인사 갑니다.’ 했죠. 아, 그랬더니 걸망을 딱 집어 들고 가버리는 거라. 할 수 없이 도로 올라와서 혼이 났지요. 그러고도 안 되겠어서 또 내빼가지고 결국은 해인사 강원에 방부를 들였어요. 1년이 못 되서 다시 직지사로 붙들려 옵니다. 군에 갔다 와서도 시봉을 하고요. 그쯤 해서 좀 서운한 생각이 들어요. 남들은 학교 가고 군승 노릇도 하는데 ‘나는 뭔가?’ 싶고 그랬어요.”
공부를 손해 봤다는 생각은 저절로 바뀌었다. 나중에 종단 일을 해보니 다른 스님들과 별반 차이랄 것도 없었다. 되레 어른 스님 곁에서 오래도록 훈습된 산승의 향훈은 신뢰를 낳았다. 법등 스님이면 믿거라 하고 요직에 중책을 맡겨 왔다. “10년 후에 시비가 일어도 명분이 꺾이지 않게 일하라.”는 은사 스님 가르침은 그대로 법등 스님 철학이 됐다. 스승에게서 대를 물린 가장 귀한 재산이다.

| 역경으로 가피를 삼은 삶
도리사 인연은 진신사리 덕이었다. 1976년, 직지사 부주지를 살 때 말사 도리사에서 진신사리가 나왔다. 사리친견 인파가 가을 태조산을 오색으로 장엄했다. 종정 서옹 스님이 ‘도리사 성역화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정계인물 이후락 씨를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일체 재정운영을 맡은 추진위는 4년이 되도록 진척이라곤 탑 하나가 전부였다. 법등 스님이 나섰다. 도리사 주지를 겸직하면서 성역화 불사를 원점에서 점검했다.
“종단에 의논을 해서 추진위 해산부터 했어요. 예산은 다 어디로 갔는지 삼백이십만 원이 전부인데 그걸로 적멸보궁 불사 계약을 했습니다. 추진위가 지어놓은 탑을 보니 시멘트 몸통에 돌판을 붙여 놨어요. 맨 위에 조그마한 갑석, 그것 하나 원석이고요. 어쩌겠습니까, 탑 불사를 다시 했지요. 모연募緣하면서 사리장사 하러 왔느냐는 말도 수없이 들었습니다. 믿을 구석은 딱 한군데였어요. ‘부처님 일인데 설마 안 되겠나.’ 하는 마음자리였지요. 빚 하나 안 지고 불사하면서 탑 뜯어낸 판석은 극락전 계단을 만들었어요. 그 돈이 어떤 돈입니까.”
불사를 하면서 경운기 세 대가 수명을 다했다. 손수 돌과 장비를 나르고 물을 실어다 부었다. 모아놓은 물이 터져 앞마당이 물바다를 이루고 헛일이 되어도 다시 일어나 물을 길어 날랐다. 모래는 낙동강에서 얻어다 썼다. 가르침은 하나로 귀결됐다. 아, 불사라는 건 어렵게 하는 거구나. 참으로 어렵게 하라는 뜻이구나. 고난이 겹칠수록 원력은 커졌다. 역경은 가피였다. 5대 적멸보궁을 잇는 20세기의 적멸보궁을 그렇게 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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