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늦은 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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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늦은 참회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04.08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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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잘 먹어도 하루 세 끼면 충분하고, 부자건 가난한 이건 누구도 한 번에 두 켤레의 신발을 신을 수는 없는 법. 그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약한 자를 밟고 서려 하는가. 인생이 허망한 줄은 다 안다. 허나 그렇다한들 무엇하랴. 잊고 살다가 막다른 곳에 이르러 죽음을 접하고 나서야 겨우 고개 한 번 떨구고 인생무상을 생각하는 걸.

|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고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간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아무 걱정 말고 그만 편히 가세요.”
은사스님의 어머니께서 먼 길을 떠나셨다. 입관 전, 그 마지막 가는 길에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는 은사스님을 보며 나는 목이 메었다. 염불이 끊어지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끝내 어머니라는 단어는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했고, 그 한 맺힌 울음은 애간장이 녹는 듯 차가운 시신 앞에 처량하게 울었다.
10살에 이모였던 스님을 따라 방학 때 절에 갔다가, 그대로 머리를 깎은 은사스님은 12살에 계를 받고 사미니가 되었다. 운문사에 들어가서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운문사 위 암자인 사리암에서 1년 더 보내고 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1년 후 다시 들어간 운문사, 스님은 대중스님들 가운데 가장 어린 막내로 7년을 살았다. 지금은 사찰승가대학이 4년의 교육과정을 거치지만 당시에는 7년이었으니, 생각해보면 아찔하게 긴 세월이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나온 은사스님은 그곳에서 도반스님들의 도움으로 글을 배워 경전을 공부했다고 한다. 졸업 후 한참 성장한 뒤에야 비로소 어린 친구들과 함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많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마친 뒤에는 중앙승가대학까지 졸업했다. 또 선원 안거는 물론 해외에서 포교당까지 운영하며 생활하기도 했다. 은사스님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의지의 비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은사스님에게 ‘어머니’란 단어는 낡은 서랍 속 사진처럼 빛바랜 지 오래였나보다. 아니 가슴 깊은 곳 쉬이 꺼내지 못할 곳에 평생을 묻어두고 계셨겠지.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고 스님은 더러 모친을 ‘할매’라고 불렀다. 내가 은사스님을 만난 지도 어느덧 23년이 지났는데, 나는 은사스님에게 어머니가 계시다는 사실을 한참동안이나 몰랐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어미 뱃속에서 나오지 않은 이가 없건만, 어리석게도 난 은사스님에게 어머니가 있을 것이란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당신의 가족사를 우리들에게 언급한 적도 없었고, 속가 모친과의 왕래도 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나 또한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다. 머리를 깎고 얼마 후였다. 출가는 세속과의 인연을 끊는 것이라 하여 출가자는 ‘어머니·아버지’조차 ‘보살님·거사님’이라 부르는 것이라고 주위에서 일러주었다. 그래서 나도 예전에 어머니를 보고 ‘보살님’이라 불렀다. 그러던 어느 해인가, 오랜만에 만난 모친이 갑자기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제발 그렇게 부르지 말아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나는 그렇게 불러야 절 법도에 맞는 거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모친은 법도고 뭐고 막무가내였다. 다른 건 몰라도 당신의 자식이 당신을 남과 똑같이 부르는 건 참을 수가 없다고, 너무나 속이 상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불가佛家의 법도가 제아무리 그렇다 해도 내 어머니가 이토록 싫다는데, 내가 꼭 그렇게 부를 필요가 있겠는가. 더 이상 가슴 아프게 할 수는 없지. 그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돌아가실 때까지 나는 어머니가 원하는 자식이 되어드렸고, 어머니의 든든한 의지처가 되어드렸다. 그러자 그분은 내게 가장 든든한 신도가 되어주었다.
계율공부를 하고 보니, 출가자는 속가와의 인연을 끊는다고 하는 우리의 고정관념과는 많이 달랐다는 사실을 알았다. 인도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출가자가 속가 가족과 인연을 끊는 것은 결코 장려되지 않았다. 오히려 출가자가 자기 가족에게 가서 불교의 가르침을 들려주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가족의 입장에서도 훌륭한 출가자는 집안의 자랑거리였다. 특히 율장에 보면, 병든 부모가 출가한 자식에게 간병을 받고 싶다고 원하면, 출가자는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간병을 해드리는 것이 의무로 되어 있었다. 어떤 스님은 탁발하러 갈 때, 약을 모아서 부모님께 갖다드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것으로 유추해 보았을 때, 출가자가 재가 부모를 위해 도움을 주는 것은 다들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건 그렇고 내 은사스님은 절에 들어온 10살 이후로 모친과 속가 가족을 가까이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그러다보니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고 어색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인간의 삶 속에서 가장 근본적인 에너지를 주는 이가 바로 어머니인데 말이다.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는 이 부자연스러운 관계가 나는 몹시 가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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