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의 공양간에는 레시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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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의 공양간에는 레시피가 없다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03.25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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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천진암 정관 스님

천진암에 막 들어섰을 때 스님은 한 보따리 짐을 부리고 있었다.
광주 각화동 농산물시장에서 장을 봤다고 했다.
신선한 바다 냄새가 요사채 아래층의 공양간에 가득해졌다.
“지금은 해조가 제철이오, 제철.”

| “요리를 생각하면 내 에고가 다 설레요”
제철이란 말은 요리사에겐 자신감의 다른 표현이다. 제철에는 모든 재료가 절정의 맛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샘미역과 곰피, 꼬시래기와 톳에 메생이도 있다. 용처를 여쭈니 마치 요리책을 읽는 듯이 요리법이 경처럼 흘러나온다. 경지란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스님은 스스로 “나는 레시피가 없소”라고 말한다.

“말로써 이미 음식을 하고 있는 것이지. 말은 생각이고, 생각이 음식을 하고 있는 것인데 요리법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

푸른 미역처럼 맑게 웃으신다. “두부 있제? 두툼하게 잘라서 들기름 촉촉하게 두꺼운 번철에 뿌리고, 고소하게 앞뒤로 지지고 산초 간장에 찍어서…” 두부지짐 만드는 법을 설명하는데, 필자 입에 침이 고인다.

함께 미역을 널었다. 말릴 것은 말리고, 끓일 것은 끓이고, 데칠 것은 데친다. 이 단순함에 절집의 고단한 일이 깊은 바다 속 궁리처럼 아득하다. 미역은 생으로 말려서 향을 보존한다. 삭풍이 내장산 골로 내려와 손이 아리게 시린데, 아랑곳하지 않고 미역의 엷은 살결들을 일일이 편다.

“겹치면 잘 안 마르고 나중에 말라도 냄새가 나요. 좀 잘하소.”

일을 돕는 필자를 농담처럼 타박하신다. 한국 사찰음식의 5대 명인이라는 스님이 한 보따리 생미역을 다 펴서 말리고 있다. 스님 말대로 일일부작 일일불식의 실천인 셈이다.

“고단하지. 그래도 나는 요리를 생각하면 내 에고(ego, 자아)가 다 설레요. 요리할 때 혼을 담는게 수행이니, 그 흥분을 기다립니다. 흥분해야 음식이 잘 될 것이고.”

스님이 백양사로 온 건 작년 초파일 모신 후였다. 본디 아름답기로 유명한 맹방해수욕장 근처의 삼척 신흥사에서 수행하던 스님이다. 백양사에서 새로운 임무가 그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중 공양으로서 사찰음식을 더 넓고 깊게 펼 것을 주문받았기 때문이었다.

내장산의 부드러운 기운이 부처님 가사자락처럼 유장하게 내려뻗은 등성이 사이에 자리 잡은 백양사 가람 뒤로 천진암이 있다. 작은 암자로 생각했는데, 절집의 배치가 규모 있고 크다. 신의 상감象嵌 솜씨 같은 기암들이 길쭉길쭉하게 박혀 있어 첫눈에도 고개가 숙여진다. 절 건물 벽에 써 놓은 경구가 이채롭다.
“조금씩 밑지면서 살자…”

선방으로 이름 높은 이 암자에서 스님은 늘 손에 흙과 물을 묻히고 있다. 이미 저문 꽃밭에는 월동배추를 심었고, 갈무리해서 말린 채소가 차곡차곡 공양간 창고에 쌓여 있다. 수행과 노역, 거둠과 공양의 일치랄까.

“일하는 게 수행 아니오. 부처님 가르침이 그랬고, 영원할 것인데.”

취재진의 공양을 만드시느라 연신 손을 놀리며 하시는 말씀이다. 손수 함으로써 선도禪道에 든다고 한 말씀과 다르지 않다. 함께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원상 스님과 호흡이 척척 맞는다. 원래 잘되는 부엌은 요리사들 사이에 지시와 말이 없다. 그저 우주의 섭리인 듯 자연스레 흘러가는 맛이 있어야 한다. 두 분 스님이 딱 그렇다. 제각기 바쁘되, 서로 돕는다. 스님이 손질한 해조가 원상 스님의 으깬 두부와 만나 그새 요리가 하나 이루어진다. 차가운 공기가 도는 공양간 안에 김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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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을 누가 길 터주지 않듯이

동치미와 톳 무침, 메생이국에 양하 장아찌로 차린 소박한 저녁 공양이다. 동치미에는 붉은 갓을 써서 색깔이 곱기도 곱거니와 매콤한 맛을 준다. 체증이 뻥 뚫리는 맛이다. 맑은 겨울이 그대로 삭아 국물에 녹았다. 양하는 여염에서도 간혹 보이지만, 절집에서 만나니 진짜 장아찌 같다. 세월과 공력이 만나서 만드는 깊은 맛이 일품이다. 그런데 그 많던 미역은 어디 갔을까. 절 음식의 선명한 하이라이트가 되는 부각을 만드실 계획이란다. 지금 철에 거두어 준비하지 않으면 초파일 맛있는 부각은 없는 것이다. 길게 보고 준비하는 절집 살림의 어려움이 여기 있다.

“얼었다 녹았다 말린 생미역으로 부각을 하면 참 맛있습니다.”

말린 미역은 초파일 전에 필요한 만큼 튀겨서 부각을 하고, 가루도 내어 귀한 음식의 재료로 쓴다. ‘절밥’으로 인기 있는 비빔밥에 고명으로 얹으면 기막힌 맛을 낸다. 오신채는 물론이고, 육것을 쓰지 않는 사찰음식에서 이런 ‘기름진’ 것들이 포인트를 주는 것이다. 부각은 동백잎, 고추, 미역의 삼박자가 맞아야 하는데, 그 한 작업으로 오늘 미역을 말린 셈이다.

“큰스님 제사, 초파일에 부각 빠지면 안 되지요. 일반 스님도 삭발식하고 영양 빠질 때 부각으로 보충하는 겁니다.”

스님은 세속의 부친이 하신 말씀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 여자는 재료가 아니라 지혜로 요리하는 것이라고. 이미 초등학교 이삼학년 무렵 부엌 살림에 손이 가 있었다는 스님이다. 콩가루 묻혀 가지 찌고, 냉국을 만드셨다니 말이다. 스님을 웃게 하는 음식이라고 하여 승소僧笑라고 하는 국수도 밀어서 만드셨다.

“제 고향이 경북 영줍니다. 그쪽 말로 ‘콩가루 없으면 밀가루 꿔서 국수 해먹지’ 하는 말이 있어요. 국수가 그만큼 귀해서 일종의 농으로 하는 역설인데, 국수 그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절집의 국수는 공이 많이 필요하고, 고명도 꼼꼼하게 준비한다. 국수 한 가지가 그러하니, 다른 일은 오죽하겠는가.

“어려서 귀의하니 이게 사람 살 데가 아닙디다(웃음).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예불하고 공양간 일하는데 아주 고됩니다. 요리하고 불 때고 예불하고 참선하고.”

체득하고 터득할 때까지 그저 묵묵히 일했다.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일도 없었다. 알아서 어깨 너머로 배웠다.

“생각해보니 그게 수행이었는기라. 수행을 누가 길을 터주지 않듯이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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