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라국의 멸망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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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라국의 멸망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02.11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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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성지순례를 가면, 붓다의 나라인 가비라국으로 ‘네팔 티라우라코트’와 ‘인도의 피프리하와’의 두 곳을 가게 된다. 붓다의 나라는 한 곳인데 현재 그곳으로 추정되는 곳이 네팔과 인도의 두 곳에 나뉘어 있는 것이다.

| 석가족의 혈통주의와 교만
붓다의 탄생지인 룸비니에 대해서는 전혀 이견이 없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전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불교왕 아소카의 기념석주가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비라국에는 이를 판단할 만한 아소카 석주가 없다. 더구나 이곳이 네팔과 인도라는 서로 다른 나라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은 문제를 보다 복잡하게 한다. 불교성지라는 많은 이익이 결부된 상황에서 국가 간의 첨예한 대립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기록이 붓다의 생애에 나타난다. 붓다는 만년에 이르러 3가지의 비극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제바달다의 반역’과 ‘가비라국의 멸망’, 그리고 ‘수제자인 사리불·목건련의 열반’이다. 이 중 가비라국의 멸망과 관련된 기록에서, 우리는 두 개의 가비라국에 대한 단서를 살펴볼 수 있다.
가비라국의 멸망은 당시 변화하던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변방국가의 문제에서부터 시작된다. 가비라국은 서남쪽에 위치한 대국 코살라국의 영향권에 있었다. 그런데 붓다의 사촌인 마하남이 왕위에 있을 때, 코살라국의 파사닉왕으로부터 공주를 아내로 맞고 싶다는 요청을 받게 된다. 이는 고려의 왕건처럼 여러 혼인관계를 통해 세력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에 의한 것이다.
당시 코살라국의 요구는 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석가족은 변방에 위치한, 귀족혼을 유지하던 종족이었기 때문에 혈통의 순수성을 엄격히 따졌다. 이는 코살라가 개방화되어 혈통의 순수성이 무너진 것과 대비된다.
군주들은 여인을 취할 때 미모를 우선으로 보기 때문에, 왕가의 혈통에는 종종 문제가 발생하곤 한다. 예컨대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 소생인 영조를 생각해 보면 되겠다. 조선은 왕가의 경우에는 특별히 어머니의 신분을 세탁할 수 있게 했다. 일반적으로 신분은 어머니를 따르는데, 이를 종모법從母法이라고 한다. 그러나 왕실의 경우는 왕의 권위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변칙조항을 둔 것이다.
인도는 조선과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신분제 사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석가족은 혈통이 불순한 파사닉왕에게 석가족의 공주를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한다. 마치 청나라를 야만으로 보고 광해군을 폐위시켰던 조선의 오만함과 흡사하다고나 할까?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아는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치욕이다. 가비라국의 최후도 바로 이런 것이다. 이는 국제정세와 시대변화에 둔감한, 자존심 강한 민족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 비유리왕의 치욕과 분노
석가족이 교만했다는 것은 불교경전에서도 다수 발견된다. 마하남은 신료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자신의 첩 딸을 공주로 속이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한다. 인도는 조선왕실과 같이 신분세탁이라는 특별조항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경우 왕의 혈육이기는 하지만 신분은 낮게 된다. 후일 파사닉왕과 이 여인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바로 비유리이다. 비유리가 8세 정도 되었을 무렵 석가족의 탁월한 활 기술을 익히기 위해 외가인 가비라로 오게 된다.
이때 마침 가비라에서는 공회당을 완성하고, 붓다를 모시고 낙성식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유리가 석가 귀족의 아이들과 놀다가, 자신은 대국의 왕자라고 으스대면서 중앙의 자리에 앉는다. 이를 본 석가귀족 아이들이 ‘천한 피를 가진 놈이 부정한 행동을 한다’고 하면서, 집단적으로 모욕하며 폭력을 행사한다. 이때 비유리는 비로소 자신의 혈통문제를 알게 된다.
인도는 도자기에 유약을 바르지 않는다. 이는 유약처리를 해서 도자기가 견고해지면, 하위신분의 사람이 사용한 그릇을 상위 신분자가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상위 신분자는 더러움에 오염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도자기는 한 번 사용하고 깨버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실제로 인도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신분질서에 따라, 식당에서도 식탁을 청소하는 사람과 바닥을 청소하는 사람이 나뉘어 있다. 그래서 식탁을 청소하는 사람은 찌꺼기를 밑으로 훔쳐내면 그만이다. 그러면 하위신분의 사람이 바닥을 청소하는 구조로 일이 진행된다. 석가귀족 아이들에 의해서 비유리가 끌려 나가자, 그가 앉은 자리를 우유로 닦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우리식으로 치면 소금을 뿌려서 부정을 털어내는 행동에 해당한다.
이때 비유리는 자신이 왕이 되면, 제일 먼저 가비라국을 무너트리고 석가족을 전멸시키겠다는 처절한 다짐을 한다. 후일 비유리는 파사닉왕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정변에 성공한다. 파사닉왕은 마가다국의 아사세 왕에게 도움을 구했으나, 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돌아오다가 코살라국의 성문 앞에서 굶어죽었다고 전한다. 비유리는 왕이 되자 석가족 공격에 나선다. 이 전쟁은 병자호란처럼 일방적인 것이었다. 경전에는 이때 석가족이 충분한 방어능력이 있었으나 전쟁을 싫어해서 양보한 것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는 명백한 왜곡이다.
당시 붓다는 비유리의 진군 소식을 듣고 진군하는 군대의 앞에 나타난다. 그때 붓다는 말라죽은 고목 밑에 앉아 계셨다. 붓다를 본 비유리가 말에서 내려, “왜 잎이 무성해 그늘이 많은 나무들도 많은데 하필 말라죽어서 그늘이 없는 나무에 계십니까?”라고 묻자, 붓다는 “친족의 그늘은 시원하다.”라고 답하신다. 당신의 친족을 살려달라고 하신 것이다. 출가를 했지만 친족에 대한 연민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비유리는 붓다의 의중을 파악하고는 군대를 돌린다. 이는 비폭력적인 수행자를 볼 경우 전쟁에 불길하다는 당시의 관습도 영향을 미친 결과이다.
그러나 비유리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다시금 진군을 하게 되고, 붓다 역시 고목에 앉아서 시위한다. 이렇게 3번째가 되자 붓다는 인연이 무르익어 어찌할 수 없음을 판단하고는 더 이상 고목으로 나가지 않는다. 전생에서부터 얽힌 죽고 죽이는 살육의 굴레가 완성된 것이다. 이때 목건련이 붓다께 자신이 신통으로 전쟁을 막아보겠다고 하자, 붓다께서는 이미 피할 수 없는 고리가 완성되었다고 하시며 물리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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