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의 싸움, 한계를 시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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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의 싸움, 한계를 시험하다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02.11 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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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 박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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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 축구 천재 메시, 개그계의 달인 김병만, 원조한류 퀸 보아.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단신, 키가 작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작은 거인’들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두석장 豆錫匠박문열(64) 선생 역시 키 160cm를 넘지 않는 아담 사이즈다. 그러나 그 작은 체구는 옹골진 장인 정신으로 야무지게 뭉쳐 있었다. 장석(裝錫, 목가구의 금속장식) 공예의일인자로 우뚝 선 그의 인생과 작품 활동을 통해, 온몸으로 부딪혀 정직하게 뚫고 나가는 삶의 자세를 배워본다.

| 두들길수록 단단해지는 강철처럼
박문열 선생의 어린 시절은 지긋지긋한 가난으로 점철돼 있다. 한국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고향인 경주에서 3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휴전 이듬해 아버지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가족은 연고도 없는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다. 집도 없이 용산의 방공호에서 기거하며, 구호소에서 깡통에 옥수수죽을 배급받아 주린 배를 달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돈을 벌기 위해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영동 철길 옆 주물공장에 취직해 쇳물 빼는 작업을 했다. 아동 노동을 단속하는 공무원을 피해 창고에 갇히기도 하고, 끓는 흙에 발이 빠지는 바람에 발목까지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맨발로 출퇴근을 하기도 했다. 그는 흡사 일벌레처럼 일만 했다. 동료들 중 가장 많은 잔업 수당을 챙겼고, 일솜씨도 뛰어났다.
남들보다 나이도 어리고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었지만, 일에 있어서 승부욕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성실성과 기능을 인정받아 큰 공장으로 스카우트되기도 했다. 기존 월급의 갑절 이상을 받는 조건이었다. 그곳에서도 일을 찾아 불나방처럼 덤벼들었다. 동틀 무렵 공장문이 열리기도 전에 출근해야간 작업까지 쇠뭉치 속에 묻혀 지냈다. 어린 나이에 몸을 상해가며 힘든 일을 하는 동생을 만류한 건 시집간 막내누나였다. 시댁의 인척 중 인사동에서 장석 공예를 하는 윤희복 선생을 소개시켜줘, 결과적으로 지금의인간문화재를 탄생시킨 밑거름이 되었다.
1968년 처음 접한 장석 공예는 또다시 그의 승부욕에 불을 붙였다. 고가구에 부착되는 아름다운 금속 장식물들을 보자 가슴이 먼저 용솟음치며 반응했다. 윤희복 선생 밑에서 어깨 너머로 공구 다루는법부터 금속기물 표면에 정으로 문양을 새기는 조이질, 음각, 투각, 상감 등 전통기법을 배우며 연습과연구를 거듭했다. 작업도구를 들면 끼니와 잠도 잊은 채 장석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스승과 함께 한 7년의 세월, 그의 기량은 무르익어 누구에게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실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여전히 생활고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가구 제작이 현대화되며 장석도 기계로 찍어내는 방식으로 바뀌어갔다. 일일이 수가공으로 소량 생산하는 전통 방식은 퇴색될 수밖에 없었고 찾는 사람도 드물었다. 독립하여 고가구와 장석 보수 일을 하였으나, 화재로 인해 공방이 모두 불타버렸다. 하지만 그는 주저앉지 않았다. 두들길수록 단단해지는 강철처럼 자신을 더욱 단련시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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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목 반닫이

| “이 자물쇠를 완성시키지 않으면집에 가지 않는다”
1979년 홍은동 허름한 건물 옥상에 작업실을 냈다.비 새는 슬레이트 지붕의 너댓 평 공간은 그를 명장으로 거듭나게 한 부화장에 다름없다. 새벽 4시부터 오전 9시까지 작품을 만들고, 오후 5시까지는 생계를 위한 작업, 다시 밤늦은 시간까지 작품에 골몰했다. 십수 년간 똑같은 생활 패턴을 유지하며, 매년 전승공예대전에 장석 관련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전승공예대전에서 상 받는 게 소원이었죠. 그런데 막상 1989년부터 계속 상을 받긴 하는데, 입선이나 장려상에 그치는 거예요.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자꾸만 저를 채찍질하게 만들었죠. ‘이게 왜 안 될까, 뭐가 원인이 있을까’끊임없이 생각하며 장석으로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보았죠. 그러다 문득7단 자물쇠에 꽂히게 됐어요.”
사실 장석 공예는 목가구에 귀속된 일괄품, 부속품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큰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전통 7단 자물쇠를 복원하겠다는 원력을세워 전국으로 발품을 팔았다. 좋은 자물쇠가 있다는 곳은 어디든 달려갔다. 그리고 1992년 드디어 귀인을 만나게 된다. 진주에서 태정민속박물관을 사립으로 운영하던 장석수집가 김창문 선생이다. 몇 번을 찾아가 어렵게 부탁하여 실물의 개폐방식을 잠깐 볼 수 있었으나, 워낙 귀하게 여기던 유물이라 사진은 물론 스케치도 허락되지 않았다. 방법은 하나, 구조물을 머릿속에 빠짐없이 입력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박물관을 나오자마자 기억을 되살려 스케치를하고, 서울 홍은동 작업실로 직행했다.
“그때가 한겨울이었는데, 꽁꽁 언 작업실 문을열며 결심했죠.‘이자물쇠를 완성시키지 않으면 집에 가지 않는다.’그 전부터 자물쇠 연구를 치밀하게 해왔기 때문에 마음 같아선 금방 해낼 것 같았지요. 그런데 이 자물쇠가 비밀적인 요소로 굉장히 정교하게 짜여져 있어 도무지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내부구조를 기억해내기 위해 아마 머릿속을 수천 번은 들어갔다 나왔다 했을 겁니다.”
그는 잠을 잤는지, 라면 몇 봉지를 끓여먹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작업에 몰입하였다. 결국 5일 만에 그 해답을 찾아내 작업실 문을 박차고 나올수 있었다. 다음해 전승공예대전에 7단 자물쇠를 출품해 문화체육부 장관상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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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 가재 반닫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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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 촛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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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단 자물쇠와 열쇠

| 우직한 ‘돌박씨’의 옅은 미소
박문열 선생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다. 수많은 동료들이 밥벌이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대량 생산의 기계화 작업을 선호할 때도 오직 전통기법을 고집했다. 시대의 외면과 가난에 맞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우리 전통 장석 공예에 대한 자부심과 장인정신이 깃든 핸드메이드의 가치를 믿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작품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한 끊임없는 자기와의 싸움이 있었다. 그 열정과 고집과 인내는 2000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며 결실을 맺었다.
“일에 있어서만은 누구에게도 지는 걸 싫어했어요. 그것은 결국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늘 내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었고, 거기서 존재 의미를 찾았던 것 같아요. 젊었을 땐 암벽 등반도 많이 했죠. 극한의 상황에 나를 몰아놓고, 죽을 고비도 숱하게 넘겼네요. 겨울엔 지리산에 들어가 일주일씩 눈밭에서 사투를 벌였죠. 제호가 ‘심경心耕’입니다. 어느 스님이 저는 마음밭을 잘 갈고 닦아야 성공한다며 지어줬죠.”
그는 불교와의 인연도 남다르다. 20대의 어느 한때 순간적으로 삶이 너무도 허무하게 느껴져 죽음을 생각했다. 죽을 곳을 찾아 들어간 곳이 강원도의한 사찰이었고, 머리 깎고 출가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너무도 깊게 드리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어두운 마음으로 불연을 맺지 못했지만, 이후 불사를 통해 마음밭을 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 부여 정림사지 황동 철물 장석,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 시우쇠(철) 장석물 등을 복원했고, 뉴욕 한마음선원장석물, 종로 조계사 8각 9층 석탑 상륜부 장석물 등을 제작했다.
“왜 힘들지 않았겠어요. 그래도 내가 선택한 일에 후회나 포기하고 싶은 적은 한 순간도 없었어요.오직 좋아서 즐기면서 여기까지 왔지요. 손재주만있다고 되는 게 아니고, 내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 것같아요. 그리고 묵묵히 가정을 지켜준 아내의 내조가 큰 힘이 되었죠. 지금은 아무런 욕심 없고, 한 작품을 하더라도 전통 장석물의 유형 보존을 위해 정확하게 만들려고 해요. 제 경험을 빗대어 후학들에겐 두 가지 정도를 당부하고 싶네요. 자신이 왜 이길을 가는지 분명히 깨우치고 가라는 것, 그리고 바른 마음으로 작품에만 전념하면 모든 건 저절로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의 삶은 정직함의 결정체다. 꼼수, 변명, 남탓이 없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다. 홍은동 시절돌처럼 우직하다 하여‘돌박씨’로 불리었다. 그는 2003년 홍은동을 떠나 벽제의 컨테이너 공방으로 작업실을 옮겼고, 다시 지난 4월 파주의 한적한 터에 전시관을 갖춘 작업 공간을 마련했다. 마당의 작은 텃밭을 바라보며 보일 듯 말 듯 미소 짓는 백발의 장인, 그 모습이 평온하고 행복해보였다.

박문열.
1945년 경북 경주 출생. 1968년 윤희복 선생에게서 장석공예를 배웠다. 전승공예대전에서 여러 차례 입선과 장려상을 수상했으며 1993년 문화체육부 장관상(7단자물쇠), 1998년 특별상(숭숭이 반닫이 장석)을 수상했다. 2000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4호 두석장으로 지정되었다. 장석공예 작품 활동을 비롯해, 사찰과 전통건축물의 장석물 복원과 제작에 힘쓰고 있다. 조계사 8각 9층 석탑 상륜부장석물을 비롯해, 광화문, 경복궁 건천궁, 국립중앙박물관팔각정 등의 장석물을 복원 및 제작하였다. 2009년부터 한국문화의집 코우스(KOUS)에서 장석반을 개설해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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