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위에서 부처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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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 위에서 부처를 만나다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02.08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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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보광사 사찰음식

음식을 대하는 일이 마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고향과 현재 사는 곳을 물어보듯, 나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산지産地를 확인하고 유통 경로를 떠올려 본다. 그뿐만이 아니다. 겉모습을 보고 이야기를 들어가며 상대의 됨됨이를 파악하듯 음식의 모양과 질감, 조리법 등을 생각해보고 판단한다. 이러한 과정을 겪고 나면 이 음식이 나에게 이로울 것인가, 또 이롭다면 어느 점에서 이로울 것인가에 대한 사안이 희미하게나마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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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광사 가는 길

도시에서 살아가다 보면 매번 이로운 음식들을 고를 수만은 없다. 출처가 불분명한 패스트푸드를 허겁지겁 먹어야 할 때, 점심에 면을 먹었는데 다시 저녁을 라면으로 때워야 할 때, 혹은 낮부터 고기를 먹었는데 저녁 회식 장소가 갈빗집으로 잡혔을 때 우리는 외롭고 쓸쓸하고 속이 더부룩해진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내가 세운 최소한의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가급적 익숙한 음식을 제철에 먹자는 것이다.

경주 보광사로 찾아가기 이틀 전부터 나는 부산에 머무르고 있었다. 지인 하나 없는 낯선 곳이지만 으레 부산에 가서 먹어왔던 음식들로 나는 애써 익숙함을 찾으려했다. 도착해서는 부산역 앞 식당에서 복국을 먹었다. 복국에는 식초를 넣곤 하는데 ‘아, 너무 많이 넣었나?’ 하고 후회가 들 정도로 넣어야 제 맛이 난다. 이어 점심에는 밀면을 먹었고 저녁에는 남포동에 가서 냉채에 술을 마셨다. 하루 동안 세 잔의 커피를 마셨고 잠들기 전에는 청주도 한 잔 했다.

문제는 보광사로 떠나기 전날 생겼다. 절밥을 먹기 전에 그동안 화식火食과 육식肉食으로 더럽혀졌을지도 모를 내 입을 조금이나마 씻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말의 죄의식이었다. 하지만 그 번화한 거리에서 내가 기대한 음식은 찾을 수 없었다. 식당 간판들을 눈에 담으며 나는 집도 절도 없이 탁발로 목숨을 연명하며 수행을 해온 초기불교의 승려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이곳저곳에서 주는 음식을 먹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음식을 크게 가릴 처지도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녹차 몇 잔만으로 속을 다스리고 산사로 향했다.

언양에서 경주를 잇는 좁은 도로는 고헌산 자락을 돌고 넘는다. 산 중턱 보광사 입구에 들어서자 수백 그루의 매화나무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매화나무 아래에는 고사리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 오솔길 가장자리에는 내가 한눈에 다 알아 보지는 못한 원추리, 헛개나무, 금낭화, 앵초, 인동초, 민들레, 할미꽃, 구절초 등이 어우러져 피고 지고 있었다. 야생화원이라 불러도 좋을 풍경이었다.

이어 만나 뵙게 된 보명普明 주지스님, 여고 시절 어느 수필집을 읽다 ‘울진 불영사에 비구니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는 내용을 보고 졸업 후 그곳에서 출가를 한다. 그때가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출가 후 스님이 처음 마주한 난관은 다름 아닌 배고픔이었다. 태고의 숲이 보존되어 있는 불영사 일대에는 유난히 율무농사가 잘되어 간식으로 율무떡과 율무죽을 해 먹었지만 젊은 나이의 허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누룽지 한 그릇이라도 더 먹을 수 있는 공양주供養主를 더 달가워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 배운 적은 없지만 처음 공양주를 지낼 때부터 음식 만드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밥은 물과 뜸을 맞추면 되고 반찬은 재료 본래의 맛을 살린 조리법으로 간만 조금 더하면 되는 것이지요.”

일찍이 스님은 선험적으로 사찰음식의 소박한 본질을 이해하고 계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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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스님 밥상은 한정식이 따로 없어예!” 밭에서 금방 따온 푸성귀에서부터 조물조물 무치고 갓 볶아낸 반찬, 오래 곰삭은 장아찌들까지 보명 스님이 손수 가꾼 자연으로 밥상은 풍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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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진리는 땅에 있었네

이후 동학사 강원에서 수행할 때 보명 스님은 배가 고프다며 쌀집을 하는 속가의 어머님에게 미숫가루를 해오라 부탁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환갑이 넘은 어머님은 미숫가루 한 말을 머리에 이고 반나절 넘게 버스 멀미를 참아가며 딸을 찾아왔다. 하지만 스님은 일주문 앞에서 짐만 받아 들고는 별말 없이 어머니를 돌려보내야 했다고 회상한다. 그렇게 구한 음식을 대중스님들과 나누고 봄이면 쑥을 뜯고 원주 스님에게 밀가루를 얻어다 쑥튀김을 해서 상에 올리곤 해서 특채공으로 뽑혀나가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어 상주 관음사와 보리암, 소록도에도 머물던 스님은 부산 도심에 포교원을 열고 우리 불교의 포교사를 새롭게 정의한 여러 시도들을 벌여왔다. 그러던 1997년 부산에서 일구어놓은 커다란 성과들을 뒤로하고 이곳 산중으로 들어오게 된다.

스님은 이곳에서 농부가 되었다. 만해 한용운의 ‘매화예찬’을 염두에 두고 꽃을 보려 심은 매화나무에서 매실이 무서울 정도로 열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것이 한 해 3톤이나 된다. 그밖에도 실상사 도법 스님의 언지言志를 받고 심은 고사리들과 이곳 산내면의 특산물인 곤달비도 수확량이 상당하다. 곰취과에 속하는 곤달비는 곰취에 비해 줄기가 부드럽고 꽃은 피되 씨가 맺히지 않아 식용으로 더없이 좋다. 아울러 손이 많이 가는 고추농사와 팥과 콩, 오가피나무와 헛개나무도 모두 스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들이다. 물론 자작나무 숲에서 간벌해 낸 나무를 패 땔감을 마련해야 하는 것도 이곳의 일이다. 그 땔감으로 고사리를 삶고 차를 덖는다.

스님은 농사를 지으면서 연기緣起를 더 철저히 깨달았다고 했다. “뒷산에 큰 헛개나무가 몇 그루 있었는데, 몇 해 전부터 헛개나무가 좋다는 말이 세간에 돌면서 사람들이 다 베어갔어요. 그런데 나무가 있던 자리에 가보니 큰 나무가 뿌린 씨앗으로 작은 헛개나무들이 여럿 자라고 있더라고요. 그 작은 씨앗이 흙과 빛과 비를 만나 다시 나무가 되고 꽃을 피우고, 잎은 밥상으로 올라와 쌈이 되고 또 덖으면 향긋한 차가 되는 것이지요. 잡초한 포기에도 생명이 있고, 호미를 땅에 찍을 때에도 흙 속에 수많은 미생물들이 있지요, 그렇기에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수많은 생명들을 죽여 내 몸 하나가 사는 일입니다. 세상 어느 만물도 홀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연기법은 경전에는 물론 이 땅에도 적혀 있는 진리이지요.”

 
| 절에서 만난 농부의 손

다시 먼 길을 가야 하는 나를 위해 보명 스님이 손수 상을 차려 주셨다. 고추와 원추리 꽃이 함께 볶아진 찬이 올랐고 매실장아찌와 독특한 향의 재피무침, 땅두릅 무침, 방풍나물 샐러드, 오가피 장아찌, 매실청으로 맛을 낸 오이냉국도 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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