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대 화각 장인들에게 잔칫상을 마련해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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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 화각 장인들에게 잔칫상을 마련해주다
  • 불광출판사
  • 승인 2012.04.23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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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의 고집불통佛通

중요무형문화재 제109호 화각장 이재만


1960년대 중반, 서울 뚝섬에 그림을 잘 그리는 소년이 있었다. 특히 만화를 잘 그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옆마을에는 늘상 그림을 그리고 있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신문배달을 하던 소년의 친구가 노인에게 소년의 그림 솜씨를 자랑했다. 그 인연으로 소년과 노인의 만남이 이뤄졌고, 우리나라 화각공예 전통이 이어질 수 있었다.

소년, 노인에게 들다
천부적인 그림 솜씨로 각종 사생대회를 휩쓸던 소년이 바로 우리나라 유일무이의 화각장 이재만(62세, 중요무형문화재 제109호) 선생이다. 그리고 그에게 화각공예의 기술을 전수한 노인은 마지막 왕족공예가 고故 음일천 선생이다. 신문배달을 하던 친구가 아니었다면, 우리나라에만 유일하게 존재해온 화각공예의 전통은 이미 끊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화각華角 공예는 쇠뿔을 펴서 종잇장처럼 얇게 다듬은 후,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화려한 색을 입혀 목기 등의 기물에 장식하는 전통공예다. 재료가 귀하고 25번 남짓의 까다로운 공정을 거치는 까닭에 생산이 많지 않아, 서민들보다는 주로 왕족이나 귀족들 사이에서 애용되었다.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는 소품이더라도 한 달 이상, 평균 서너 달의 작업 시간이 걸린다.
이재만 선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승의 집에 들어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봉을 하듯 모셨다. 사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집안일까지 도맡아 했다. 스승이 만든 작품의 판매가 여의치 않을 때는 자급자족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새벽밥을 짓고, 아침까지 도안을 그리거나 쇠뿔을 연마했다. 오전에는 남의 집 농사일을 도와준 후 배추나 무를 얻어오고, 어느 때는 벽돌공장에서 일한 일당으로 쌀을 사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밤 10시까지 작업에 몰두했다.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지금도 화각을 모르는 사람이 90% 이상일 겁니다. 당시는 더했지요. 먹고 살기 어려워 화각공예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었어요. 작품을 아무리 아름답게 만들어도 판로가 없었던 거죠. 선생님은 이미 80대 고령자셨는데, 대단한 실력가셨습니다. 화각뿐 아니라 소목, 금속공예, 옻칠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해 섭렵하셨어요. 한 번 보면 못 만드는 게 없으셨죠. 심지어 악기와 놋주발도 손수 만드셨습니다.”
그는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배웠다. 작업이 지루하고 힘들 땐, 젊은 혈기에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니가 마음을 다잡아줬다. 어머니가 준비해준 밑반찬을 가지러 가서 하룻밤이라도 자고 올라치면, 매몰차게 돌려보냈다. 전통문화는 항상 외로운 자기와의 싸움이니, 순간의 편안함과 욕망을 이겨내라는 가르침이었다.

화각의 맥을 잇다
스승과의 생활 당시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져, 이재만 선생은 새벽 3시면 어김없이 눈을 뜨고 맑은 정신으로 도안을 그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돌이켜보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경제적 궁핍때문에 일본의 유혹에 넘어갈 뻔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선택한 길을 후회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스승과의 약속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스승은 마지막 이별의 순간까지 그에게 화각공예의 길을 올곧게 이어가기를 부탁
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떠나, 화각공예전통의 맥을 꼭 이어주기를 부탁하셨어요. 그것이 선생님의 평생 꿈이셨습니다. 저도 바로 확답을 드렸지요. ‘ 한눈 팔지 않고 평생직업으로 가지고 가겠습니다’라구요. 그건 절대 배반해서는 안 되는 선생님과 저의 의리예요. 그 힘이 저를 채찍질해 1996년 화각장에 지정되는 기반이 된 것 같아요.”
이재만 선생은 손가락이 온전치 않다. 갓난아기때 화로를 잘못 짚어 왼손 전부와 오른손 3개의 손가락 마디가 부분적으로 떨어져나갔다. 처음엔 연장 잡
기도 힘겨웠다. 그는 ‘어떻게 해야 안전하게 빨리 할수 있는가’를 연구에 연구,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러다 보니 양손만 아니라 온몸을 이용하는 법을 터득하고, 힘줄 때 자신만의 노하우를 찾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을 많이 한다 해도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그는 예인 집안의 피를 이어받았다. 할아버지는 단청의 대가였고, 아버지는 대목, 어머니는 자수를 놓았다. 그리고 현재 화각공예는 그의 두 아들[이종문(28), 이종민(25)]에게 이어지고 있다. 한때 화각공예 전수자는 십수 명에 달했으나 이제 두 아들만 남게 된 것이다. 화각공예가 얼마나 까다롭고 힘들고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하는 작업인지 짐작케 한다.
“아이들이 대견하고 고맙죠. 대학에 가서 공부도 하고 건축설계사 자격증도 땄는데, 화각보다 시시한가 봅니다. 어려서부터 제가 하는 걸 보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것 같아요. 화각이 생활화된 거죠. 제가 가르치는 건 방법론적인 조언에 불과하고, 본인 스스로 감각,촉각,후각을 이용해 터득해야 진정한 기술이 나와요. 피부로 느끼고 마음속에 담아둬야, 위급할 때 써먹을 수 있습니다.”


인생을 걸고 지켜나갈 만한 자부심 높은 문화
평생을 앞만 바라보며 달려온 이재만 선생은 지금도 여전히 쉴 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가장 주안점을 두고 하는 일은 화각공예와 관련한 자료의 수집과 정리다.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화각공예품은 의외로 많지 않다. 왕족의 묘에 소장품과 함께 매장되는데, 쇠뿔이 유기질이라 쉽게 부패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해외로 반출된 유물들이 남아있어, 사비를 들여 프랑스와 일본 등 세계 곳곳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해 정리하고 있다.
“화각장으로서의 의무감이죠. 자료가 충분해야 화각공예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고, 유물 복원 작업에도 도움이 되며, 후대 다양한 작품 활동의 토대를 마련해줄 수 있어요. 제보자가 나타나면 만사를 제쳐놓고 세계 어디라도 달려갑니다. 제가 이런 작업을 해놔야, 후대 화각 전승자들이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울 수 있을 거예요. 그들에게 잔칫상을 마련해놓는다는 심정으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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