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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법구] 베어라, 네 마음속 번뇌를내 마음의 법구

본의 선학자(禪學者)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이 주해하고 일지(一指)가 우리말로 옮긴 『임제록』이 책으로 나왔던 덕분이었다. 책을 읽기 2년 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한 해 전에 취직을 했으며, 여섯 달 전에 결혼까지 한 참이었다. 해가 바뀌면 서른 살이 될 것이었다. 모든 것이 단단해져 가는 느낌이었고, 앞길은 훤해 보였으며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도 안정되어 가던 참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뭔가 다른 걸 구하고 있었다.

“함께 도를 닦는 여러 벗들이여! 그대들이 참다운 견해를 얻고자 할진대, 오직 한 가지 세상의 속임수에 걸리는 미혹함을 입지 않아야 한다.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권속을 만나면 친척권속을 죽여야만 비로소 해탈하여 어떠한 경계에서도 투탈자재(透脫自在)하여 얽매이지 않고 인혹(人惑)과 물혹(物惑)을 꿰뚫어서 자유자재하게 된다. 제방의 여러 구도자들이 언구(言句)와 형상에 의지하지 않고 내 앞에 나온 자가 없었다. 나[山僧]는 항상 깨달음의 연장에 있어서 사람들이 간신히 의지하고 있는 언구와 형상을 쳐부순다. 손을 써서 나오면 손으로 쳐부수고, 입을 통해 나오면 입을 작용하여 쳐부수며, 눈으로 작용하여 나오면 눈으로 작용하여 쳐부순다. 지금까지 어떤 언구나 형상에도 의지하지 않고 단지 홀로 투탈자재하게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 눈치를 보면서 옛사람들의 언구와 행동을 흉내 내고 있을 뿐이다.”(『임제록(臨濟錄)』, ‘시중(示衆)’ 편)

뛰어난 글은 신명과 기합과 리듬이 있어 시처럼 느껴진다. 좋은 시는 폭포와 천둥, 바람 소리 같은 자연의 노래를 닮고 자연의 노래는 시시한 인간의 인연을 단번에 잘라버리는 칼날을 담고 있다. 칼날이 지나가고 피와 기름이 남은 자리에 깨우침이 온다. 먼저 난[先生] 것들(부처, 조사, 스승, 아버지, 임제)을 닥치는 대로 쳐부수라, 나를 때려 엎으라는 외침은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임제는 겉껍데기를 부수고 허식의 방패를 꿰뚫고 헛것인 나를 죽임으로써 철저하게 형체도 없이 한 후에 본면목을 찾으라고 충고한다. 그 자신이 미친[風癲漢] 이리 같은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으니 겉치레에 빠진 스스로를 만나면 스스로를 쳐부수는 대장부다. 나는 임제에게서 고고하게 군림하는 자가 아닌, 서로 물어뜯어가며 사랑하는 자의 면목을 보았다.

임제의 말은 맵고 정나미 떨어지는 비민주적이고 단언적인 역설어법이다. 그럭저럭 안정되어 가던 나[小我] 나름의 세계를 이것도 저것도 아닌, 눈·코·귀 분별이 없는 혼돈(混沌)의 형제국으로 만들어 버리며 갈 데까지 가라, 가보라고 채찍질한다.

“나는 그대들과 깨달음에 대해 문답하고 싶다. 그러나 5년, 10년이 지나도록 한 사람도 없구나. 모두 풀과 잎사귀, 대와 나무에 의지한 도깨비, 또는 들여우가 둔갑한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똥덩어리 같은 옛사람들이 내뱉은 언구를 되씹고 있다. 나는 그대들에게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 부처도 없고 법도 없으며, 닦을[修] 것도 없고 증(證)할 것도 없다. 그런데 무엇을 밖으로만 구하려고 하느냐.”

그로부터 20여 년을 넘도록 나 역시 들여우 족속으로 우쭐거려온 것은 아닌가. 우물거려온 언구에 대해 분에 넘치는 보시를 받아왔으며 자만심에 눈까지 멀어 버렸다. 다시 상대한 임제는 벼락같은 호통으로 나를 쓰러뜨린다. 들여우가 들여우를 뒤집어 써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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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 1994년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간행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한국일보문학상, 동서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오영수문학상을 받았다.

성석제  bulkwang_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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