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가 보렴, 와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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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가 보렴, 와줘서 고맙다
  • 관리자
  • 승인 2010.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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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병일기

며느리 얼굴 보시는 게 근 두 달 만이었다. 아내를 먼저 들어가게 하고 잠시 후 뒤따라 들어갔더니, 역시 잘 알아보지 못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내 얼굴을 보고 “어, 너 왔니?” 하고는 눈길을 며느리에게 돌리고 “저게 내 셋째 아들인데, 따라들어오는 걸 보니까 너는 내 며느린가 보구나.” 하신다. 추리력은 괜찮으시다. 기억력이 문제지. 그리고 기억 잘 안 되시는 것 가지고 별로 답답해 하시는 기색도 없다.

아무래도 기억의 출력 문제보다 입력 문제에 비중이 있는 것 같다. 몇 주 전 전문학교 시절부터의 친구인 이윤재 선생님과 이혜숙 선생님이 오셨을 때는 근 70년 전 일까지 떠올리며 환담을 나누셨는데. 오히려 십여 년 이내에 있었던 일은 잘 기억 못하시는 것이 많다. 뇌 기능이 퇴화하신 뒤 겪으신 일은 기억이 잘 안 되시는 것 같다. 그런데 이곳 오신 후 반년간의 일은 기억이 꽤 되시는 걸 보면 뇌 기능이 많이 회복되신 것 같다.

이 며느리는 지난 몇 해 동안 나 다음으로 많이 보신 사람인데도 쉽게 파악이 안 되신다. 병원 계실 때 거의 매일 가 뵙는데도 간병인이 “이 분 누구세요?”하면 천연하게 “이 사람? 내 제자야.” 하시곤 했다. 하기야 쓰러지시기 전 갑사 대자암으로 찾아뵐 때는 아내가 인사드리고 잠깐 물러나 있는 사이에 나를 보고 “저 아주머니 너 아는 사람이냐? 인상이 참 좋구나.”하신 일까지 있으니까.

아내랑 먼저 시간을 가지게 해 드리려고 사무실 다녀올 생각으로 “어머니, 저는 볼일 좀 보고 올게요.” 하니까 “볼일? 오줌이냐, 똥이냐?” 하신다. 이럴 때는 짐짓 장난치시는 건지 어떤 건지 잘 분간이 안 된다. 장난치시는 것 같은데, 시치미가 여간 아니시다.

사무실에 가 입원비를 내고 돌아올 때 마침 보험공단 직원이 도착했다. 장기요양보험 갱신을 위한 조사를 나온 것이다. 조사하는 동안 입회해 있는데, 못 보던 사람 보고 안 하던 일 하니까 재미있어 하신다.

조사원의 질문에 대답하실 때마다 “네, 어머니, 훌륭하십니다.” 추임새를 넣어 흥을 돋워드리는데, 하다 보니 신이 너무 나셨다. 뭐든지 잘한다고 주장하시는 것이었다. 밥도 손수 잡숫고, 화장실도 혼자 가시고…. 조사원이 정말 곧이들으면 보험 수혜자격이 잘릴 지경으로 다 잘한다고 우기시는데, 내가 계속 “네, 어머니, 잘하십니다.” 하고 있으니 조사원이 나를 쳐다보고 씩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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