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천도 이후 북위의 정치적 상황
태화(太和) 17년(493 A.D) 고조 효문제(471-499)는 낙양(洛陽)으로 천도하면서 호족의 풍속을 버리고 유교국의 이상적인 제왕을 꿈꾸면서 한화(漢化)에 더욱 철저하였다. 세종 선무제(500-515)는 경명(景明)초에 낙양(洛陽)의 용문(龍門)에 석굴 개착을 시작하였고 뒤이어 숙종 효명제(516-528)대의 사찰건립 및 불상조성을 북귀 최성기의 양상을 나타낸다. 한 예로 낙양 성내에 영(靈)태후의 발원에 의한 영녕사(永寧寺)의 건립이다. 여기에 낙양불교의 기념비적 조형물이라 할 - 100리 밖에서도 보인다는 - 영녕사 9층탑[낙양 영녕사 9층탑(516년경) 목조 400척과 낙양천도 이전 옛수도 산서성 대동 「평성 영녕사 7층탑(467년경)」 목조 300척은 지역과 건립연대 및 규모가 다름]이 세워진다.
그러나 한 세대도 지나기 전 영녕사 9층탑은 소실되고 북위도 정광(正光)이후 내란과 외침이 겹치면서 534년 효무제(532-534)는 고환(高歡)의 위협을 장안으로 피하여 서위(西魏)를 세우고 고환은 효정제를 옹립하고 업도로 도읍하여 동위(東魏)를 세우면서 낙양의 영화도 서산에 떨어지는 해와 같이 낙조가 깃든다. 얼마 후 동위는 멸망하여 북제(北齊)로 되고(550년) 서위는 북주(北周)로 변하였다.(557년)
이러한 북중국의 분열시대에 동에서는 업도(業都), 서에서는 서안(西安)이 번영을 구가한다. 북제를 멸한 것이 북주의 무제이며, 이 영매한 군주 무제에 의한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 중 두 번째 법난을 만나게 된다.(574년, 北周建德3)
법난은 5년간 계속되다가 무제는 죽고 선제가 즉위하고 임도림(林道林)의 청에 의한 불교부흥의 소칙이 내려졌고(578년) 그 후 실권을 쥔 양견(楊堅)은 불교재부흥정책을 표방하고 정제(靜帝)의 선양을 받아 수·문제(隨·文帝)로 즉위한 후 남조의 진(陳)을 병합하여 남북조 대립시대를 종식하고 천하통일을 성취한다.(589년 開皇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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