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불교] 미얀마 불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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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불교] 미얀마 불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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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8.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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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불교

 

  미얀마 불교사 개관

  미얀마(공식 명칭은 미얀마 연방, Union of Myanmar)는 북서로는 인도의 아샘주, 북동으로는 중국의 운남성(雲南省), 동으로는 라오스와 태국, 남서로는 안다만 해와 벵갈만 사이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국토 총면적은 67만 6,552Km이며, 지리적으로 남부의 해안지방(하부 미얀마)과 북부의 내륙지방(상부 미얀마)으로 구분된다.

  미얀마는 1989년 5월 27일 국가명을 구 영국식민지 시대에 명명된 `버마` 에서 `미얀마` 로 바꾸었다. 미얀마는 총인구 45,103,809여 명 중 89.4%가 상좌부 불교도인 대표적인 상좌부 불교 국가이다. 미얀마에 상좌부 불교가 발전한 것은 11세기 중엽의 일이다. 11세기 중엽 상부 미얀마의 파간을 중심으로 버마족에 의한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립한 아노야타 왕(1044~1077년 재위)은 하부 미얀마 몬족의 나라에서 500명의 상좌부 승려를 팔리어 삼장과 함께 파간으로 데려와서 미얀마 상좌부 불교를 확립시키고자 하였다.

  그 후 아노야타 왕은 스리랑카의 대사파(大寺派)로 승려를 보내어 대사파 전승의 상좌부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파간 왕국은 13세기 말 몽고의 쿠빌라이 칸에 의해 왕국이 멸망하기까지 5천여 불탑과 사원을 건설하면서 상좌부 불교를 발전시켰다.

  파간 왕국 멸망 후 200여 년 동안 혼란한 시기를 거쳐서 15세기 후반에 몬족 출신의 담마체디(1472~1492년 재위)왕은 남부 미얀마의 페구를 중심으로 페구 왕조를 일으킨다. 담마체디왕은 아노야타 왕에 이어 두 번째로 스리랑카에 사절단을 보내 스리랑카 대사파의 상좌부 불교 계율의 맥을 도입. 당시 분열되어 있던 미얀마의 승단을 통일시키고 불교를 부흥시켰다.

  이후 미얀마 불교는 16세기 법난을 거쳐 17세기에는 가사의 착의법을 둘러싸고 승단의 정통성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 승려가 마을에 들어갈 때 가사로 두 어깨를 가려야 하는데(通肩派) 한쪽만 가려도 되는가 하는 문제로 분열, 보도파야 왕(1782~1819재위)이 통견파로 통일시킴으로써 이 문제가 종지부를 찍었다.

  보도파야 왕은 이 외에도 종교정화위원회의 설치와 아차리야(스승)의 지제이 중심이 되어 증대하는 승단을 정비하려고 하였으며, 스리랑카의 낮은 카스트의 사미를 당시의 수도 아마라푸라에 불러 비구계를 받게 해줌으로써 이들이 스리랑카에 돌아가 아마라푸라파를 형성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보도파야 왕에 의해 시도된 승단의 조직체제 정비는 19세기 후반에 즉위한 민돈 왕(1582~1877 재위)에 의해서 한층 강화된다. 민도 왕은 학식 있는 고승으로 형성된 종교회의소를 수도 만달레이에 두고 상좌부 승려와 사원의 감독 및 지도를 하였다. 민돈 왕은 1871년에 상좌부 제5차 결집을 개최, 2,400명의 승려를 만달레이에 소집, 팔리삼장과 주석서를 정비, 편찬하여 대리석 729매에 새겨서 만달레이의 쿠도토 탑에 세워 놓았다. 

  19세기 후반 영국 식민지가 된 미얀마는 그 영향으로 승단의 질서가 흐트러지기도 하였고, 승단 내에서 자체적으로 정화를 위해 몇몇 종파가 생겨났는데 그 대표적인 종파가 쉐진파, 드와라파, 겟트윈파이다. 하지만 민돈 왕의 종교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투담마파는 위의 세 파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한 승단 내부의 문제가 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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