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군 선화공주의 기원도량 미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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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군 선화공주의 기원도량 미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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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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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밀 국토를 찾아서

  익산군은 마한시대부터 백제시대까지 항상 왕권과 연결되어 많은 문화유산을 그 땅에 남기게 되었다. 수많은 성터와 사지, 석불과 유서 깊은 현존 사찰들이 그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옛날의 그 현장에서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이 익산군에 산재한 유적을 대충 훑어본다고 하여도 하루로는 어림도 없다. 적어도 이틀은 보아야만 하고 그것도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지나갔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깊은 가을, 역사의 향기를 그 현장에서 고전을 읽듯 천천히 음미해 보자.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석탑은 단연코 미륵사지 석탑이다. 현재 높이 14.24m인 이 탑은 한쪽이 붕괴되어 6층까지 남아있으나 조선조 영조대왕 때에 강후진(姜候晋)이 쓴 금마와유기(金馬臥遊記)에는 "7층 석탑 상층 개석 위에는 수삼인의 농부가 앉아 있었다."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 좀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때에도 일본 학자들이 9층 탑으로 복원도를 제시한 바도 있어 상륜부까지 포함한다면 실제로 20m에 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석탑이 단순하게 높고 크다는 것, 오래됐다는 것만 자랑했다면 그 이름에 값하는 일은 아니다. 이 석탑은 석탑이지만 목조건물의 양식을 그대로 적용하였고 이러한 양식은 바로 백제탑의 특징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에는 이러한 백제의 기술력이 서라벌에 들어감으로써 불국사의 다보탑을 낳게 되었으니 전쟁의 승패를 차치하고 본다면 문화적 통일은 공평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더구나 이 미륵사는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와 꾀로써 결혼한 서동 (곧 백제의 무왕)이 왕비 (선화공주)와 함께 창건한 원찰이라는 이야기가 덧붙어 있다.

  <삼국유사> 권 2 무왕조에 "하루는 무왕이 왕비와 함께 지명법사 (知命法師)가 있는 사자사(獅子寺)에 가고자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을 때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이 나타남으로 둘은 수레를 멈추고 경배를 올렸다.

  왕비가 이 터에 큰 절 세우기를 청함에 무왕이 이 불사를 지명법사와 의논하니 지명법사는 신력 (神力)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웠다. 이에 미륵 삼종의 존상과 법당, 탑, 회랑을 각각 세곳에 세우고 이름을 미륵사라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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