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현실의 도피처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처님의 가피지력에 의지하려는 사람도 있고, 그 가르침을 통해 육체적·정신적인 의식을 고양시키려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기필코 부처님처럼 열반을 경험해보겠다고 나선 사람도 있다.
이렇게 불교는 자기 노력과 이해의 정도에 따라, 저마다 다른 얼굴 모습을 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다르게 이해되고 있을 것이라고 본다. 백 명의 불자가 법당에 앉아서 예불을 드리고 있다면 백 명의 불교신자가 앉아있다고 해도 무리한 표현이 아닐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탐진치를 극복하셨을까?
그런 면에서, 나는 부처님의 수행방법을 배우고 싶어 하는 불자(佛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대처하셨을까?” “탐진치의 마음을 갖지 말라고 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탐진치를 극복하셨을까?” 하는 것이 나의 관심사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금강경(金剛經) 읽기를 생활화하며 자랐다. 특히 어머니는 단 하루도 금강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을 강요(?)하여, 우리 집 5남매는 금강경 읽기로 시작하지 않으면 그 날 하루가 허전할 정도로 몸에 배어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금강경을 읽고 또 읽었다. 40여 년을 읽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왜 어머니가 그렇게 금강경 읽기를 가족들에게 권하였는지 깊은 뜻을 알 것 같았다. 거기에는 내가 알고 싶어 하는 부처님의 마음가짐, 부처님의 수행방법이 엿보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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