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법구] 길 위에서 만나는 무명씨(無名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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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법구] 길 위에서 만나는 무명씨(無名氏)
  • 노익상
  • 승인 2009.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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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법구

비박이나 텐트처럼 한뎃잠을 자거나 취재원 집에서 기숙하는 날은 달포거리로 쳐 보름 정도 되는 게 내가 하는 직업의 특성이다.

기록을 목숨처럼 여기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일이어서 이런 잠자리는 어언 이십여 년이 지나는 동안 동무들이 나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고을고을 장거리를 찾는 장돌뱅이나 그 시절의 방물장수처럼, 집보다는 길 위의 나날들이 어느덧 익숙한 생활이 된 셈이다. 그렇다고 매 번 작정을 하고 길을 나서는 것은 아니다.

따로 정처를 두지 않고 떠날 때도 제법 있는데, 대개 그런 날은 맘이 느슨해지거나 색다른 소재거리가 궁해질 때라고 할 수 있다. 목적 없는 떠남이 대체로 그렇듯, 자동차 발동을 걸 때부터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새롭게 만날 ‘무명씨’와, 뜻하지 않은 만물의 변화를 만나고 보게 될 기대감으로 스쳤던 불안감은 어느덧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렇게 길을 나서면 고속도로나 국도보다 지방도나 군도를 타고 누빌 때가 많다. 오가는 자동차도 적거니와 꿈꿈한 저자 풍경과 냄새도 맡을 수 있어서 이나저나 작정이 없는 여정은 찰나의 설렘과 함께 적잖은 소득을 안겨주었다. 실제로 낯선 촌구석 점방을 찾아 들어가 간장을 끼얹은 두부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날도 많았다. 이럴 때는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저 심심하달밖에 없는 고을 촌로들과 자리를 섞는 일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간스메’라며 그이들이 부르는 비린 통조림이 나오고 술병이 늘면서 촌로들의 지난했던 체취가 무르익으며 다가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애간장 녹이는 남녀 비사나 과부의 죽음 같은 가슴 아픈 이야기를 거저 듣는 일도 그즈음 따라붙었던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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