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인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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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인의 무게
  • 관리자
  • 승인 2009.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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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불서불(東佛西佛)

따라서 중학생일지라도 그것은 만들어낼 수 있는 쉬운 문제일 수도 있다. 요컨대 인간은 가치의 존재이지, 결코 물리적 집합(集合) 일수는 없다는 뜻일 게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요사이는 인간을 재는 가치기준이 다분히 물리적인 듯하다. 무심코 흘러나온 말 한 마디에도 천근의 무게가 있는 법이다.

몸은 고추처럼 작아도 그 덕(德)의 무게는 천하를 덮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자꾸 겉으로만 인물의 됨됨을 평가하는 경향이 많아진다. 그래서 헤비급 인사하면 먼저 씨름선수를 연상하게 되고 경량급하면 좀 체신없는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곤 한다.

스스로의 무게가 어떤지
7세기신라사람들이 원효를 어떻게 보았을까? 광인(狂人)이며 파계승(破戒僧)이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간으로 평가해 버리고 말았다. 오늘날 원효가 있다해도 우리 입장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님이라는 분이 매일 룸싸롱에서 술이나 퍼 마시고, 혼자 사는 과부를 꼬셔서 아들을 낳았는데 어느 누가 그를 큰 스님이라 부를손가.

그뿐인가 TV에 나가 앉아, 그것도 무슨 가요쇼 같은 데서 자기가 작사 작곡한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우리가 대붕을 몰라준 참새떼라고 생판 신라인들을 욕지거리만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원효의 몸짓, 손짓에는 어느 한구석 상스러운 데가 없다. 도무지 형식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만큼 세상의 평판을 인식하지 않고 살기는 어려운 일이다. 정녕 무제한급의 무게를 갖지 않는 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앞서 말한대로 그 무게는 바로 인품에서 나온 것이다.  또 자신의 무게를 과시할 필요도 없다. 좀 시간의 간격이 있어서 그렇지, 언젠가는 제대로 된 눈금의 저울이 나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정반대의 경우도 비일비재 하다. 이 세상 사람들과 모조리 벗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글이나 모습으로써 친한 사람들이 있다. 아주 감동깊은 글을 읽고 나서 참 무게 있는 이라고 감탄한다. 그 다음에는 그 사람 이름 비슷한 것만 보아도 가슴 두근거린다. 어디서 강연을 한다면 가고 싶고, 잡문이라도 실려 있으면 꼭 그 잡지를 사보곤 한다. 그러다가 평소 그 분의 말이나 글과 아주 위배되는 일을 목격한다. 혹은 유비통신으로 들을 때면 말할 수 없는 배반감에 젖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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