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보조국사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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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보조국사의 생애
  • 서윤길
  • 승인 2009.06.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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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II

보조국사의 속성은 정(鄭)씨이고, 오늘의 황해도 서흥 사람이다. 그의 휘는 지눌(知訥)이요, 자호를 목우자(牧牛子), 시호는 불일 보조국사다.

󰊱 출생과 배움의 시기

보조국사(1158~1210)는 휘가 지눌이요, 자호는 목우자며, 시호는 불일보조국사이다.

국사의 속성은 정씨로서, 경서의 동주 즉 오늘날의 황해도 서흥군 사람이다. 국사의 아버지는 그 당시 국학학정을 지낸 바 있었던 광우였으며, 어머니는 개흥군 사람이었던 조씨 부인이다. 국사는 이 두 분사이의 명문거족 집안에서 고려 제18대 예종12년에 탄생하였다.

국사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현재 전해지고 있는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는 없으나, 어린시기에 병으로 몸이 약하여 약을 썼으나 그 효험이 없어 병색이 완전히 낫지를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생각해 보면 국사는 보통의 사람보다 몸이 약하여 얼마동안은 고생을 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이 처럼 신병으로 고생을 하였던 국사는 8세가 되는 해(동사열전에는 16세시라고 되어 있다)에 선문 구산 중의 하나였던 사굴산파의 종희스님에게서 출가 득도하였고, 그 뒤에 국사는 다시 구족계를 받았다. 그러나 자세한 기록이 없으므로 어디의 누구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는가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후 청년기가 될 때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점도 상고할 길이 없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국사가 그 나이 25세 되는 해인, 고려 명종 12(1182) 1월, 보계사에서 행한 담선법회(談禪法會), 즉 당시 승려들의 국가고시인 승과에서 선과부문으로 합격하였던 사실을 비추어 보면 국사는 25세 이전 8세 이후에 어디선가 많은 공부를 하였다고 짐작되는 것이다.

국사가 비록 승려의 과거에는 응시하여 합격은 하였으나 세상의 명리에 탐착하지 않고 바로 그 승과를 행하는 담선법회장에서 그에 참여하였던 동지들과 정혜결사를 맺어 수도에 정진할 것을 굳게 맹약하였던 것이다. 그 후 선불장이 승려의 무모한 정치적 관련으로 인하여 소란스럽게 되자 국사는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가 수행할 것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전남 나주(당시 창령군)로 옮겨 청원사에 계시게 되었다.

국사가 청원사에 머무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육조 혜능스님의 법보단경을 읽던 중⌈진여의 자성이 생각을 일으켜서 육근이 비록 보고 들어서 깨달아 알지만, 만상에 물들지 않고 그러면서 그 진성은 항시 자재하다⌋는 글귀에 이르러서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불전을 돌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청원사에서 3개 성상을 보낸 국사는 그의 나이 28세 되는 해(1185)에 현재의 경북예천군에 있는 학가산(당시는 下柯山) 보문사로 그 주석을 옮기었다. 이곳에서 국사는 일체의 장경과 모든 선인들의 논저술을 열람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중국 이 통현 장자가 쓴 화엄론을 발견하여 숙독한 뒤 크게 얻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 국사는 이때의 심정을<마음이 원돈의 관문에 끌려서 마치 옛 벗을 만난 것 같다>고 술회하였다. 이때에 국사는 어떻게 하면 말법의 시대에 정법을 펼 수 있을까를 심히 걱정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국사의 나이 31세 되는 해 봄에 옛날 승과 당선 시에 결사를 서로 약속했던 옛 친구 득재 선백이 팔공산 거조사에서 편지를 띄워 옛날의 약속대로 결사수도하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국사는 자기의 수련과 지도 원리의 정립에 주력하기 위하여 이를 거절한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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