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용운 옥중 공판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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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용운 옥중 공판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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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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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부록 / 한용운사상의 원천

     경찰 신문 조서

문:   본적 ∙ 주소 ∙ 출생지 ∙ 성명 ∙ 신분 ∙ 연령은?

답:   본적은 강원도 양양군 도천면 신흥사 ∙ 승려 ∙ 현주소는 경성부 계동 43번지, 출생지는 충남 홍성군 읍내, 한용운, 41세.

문:   관리 ∙ 공리 ∙ 의원이 아닌가?

답:   아니다.

문:   작위 ∙ 훈공 ∙ 연금 ∙ 종군기장을 가졌는가.

답:   갖지 않았다.

문:   지금까지 형사처분 ∙ 기소유예 ∙ 훈계방면을 받은 일이 있는가.

답:   없다.

문:   경성에는 어느 때 무슨 일로 왔는가.

답:   지난 1919년 음력 3월 중순 향리에서 상경하였다. 그 목적은 수양에 관하여 서적을 편찬해주기 위함  이었다.

문:   그 서적을 발행한 일이 있는가.

답:   오늘까지 제3호를 발행하였다.

문:   그대가 손병희(孫秉熙) 외 31인과 같이 조선독립을 할 선언서를 비밀히 배포한 목적과 동기는 무엇인가.

답:   본년 1월 27일 ∙ 8일경 나는 최린(崔麟)과 나의 집에서 화합하여 여러 가지 시국에 대한 문제를 논의  하던 중 구주전쟁도 끝나고 강화담판을 체결하기까지에 이르렀으며 기타 식민지에서는 자결의 원칙에 의하여 자유독립을 하려고 하니 이 때 독립할 운동을 하자 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인원으로서는 목적을 달하기 어려우니 다수의 동지를 얻는데 같이 힘쓰자고 말한 후 작별하였다. 그 후 재삼 최린과 상담한 바 천도교회는 신도가 많으니 천도교를 중심으로 운동하자고 하였으며 본년 2월 중에는 천도교인 오세창(吳世昌)을 만나 최린과 서로 의논한 것을 말하고 동인의 찬성을 얻었으며 또 동인에게 다른 곳에서 인물을 구하여 동지를 모집할 것을 말하였다.

문:   그 후 또 어떻게 하였는가.

답:   그 후 내가 최와 오를 다시 만났을 때 양인에게 말하기를 천도교인만 말고 예수교회불교신도를 차차 동지로 하고 그 사람의 명단을 국민의 대표로 하여 공공연한 독립운동을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서로 비밀을 지키는 열렬한 인물을 동지에 가입시키려 하였다. 어제(2월 28일) 낮에 내가 최린 집에 가고 있을 때 이승훈(李昇薰)이 왔는데 그때 최는 명일 독립선언을 할 것을 내정하고 있다고 하면서 큰 일을 할 동지들이 서로 얼굴을 알고 있지 아니하면 안되겠기에 오늘밤 손병희씨 집에 동지 일동이 집합하기로 하였으니 손병희씨 집으로 오라고 말하므로 어제 밤 8시경 손병희 집에 모였다.

문:   누구누구 모였는가.

답:   내가 아는 사람은 손병희 ∙ 오세창 ∙ 이승훈 ∙ 박희도(朴熙道) ∙ 홍병기(洪秉箕) ∙ 권동진(權東鎭) ∙ 권병덕(權秉悳) ∙ 이종일(李鐘一) ∙ 이갑성(李甲城) ∙ 최린 외 10인과 그때 7 ∙ 8인이 와서 서로 만났다.

문:   그곳에서 어느 때 의논을 하였는가.

답:   3월 1일 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하였으며 그 장소를 최초 파고다공원이 적당하다고 하였으나 박희도가 이것을 반대하였다. 그것은 파고다공원에는 각 지방에서 모인 사람이 많을 뿐만 아니라 또 내가 오늘 비밀히 들었지마는 학생들도 미리 알고 있다 하므로 이들 학생이 많이 모였을 때 우리들이 경찰에 인치되면 이들 대중과 학생이 어떠한 난폭한 행동을 할지 모르니 차라리 다른 곳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명월관지점으로 변경하자는 의논을 하고 각각 돌아갔다.

문:   어제 밤 선언서의 인쇄물을 각자가 분배하기로 하였는가.

답:   아니다. 어제 밤 각자가 분배하기로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께 최린 집에서 선언서의 초안을 한번 읽어보고 어제 낮에 이종일에게서 3천 매(枚)의 인쇄물을 받아서 그것을 어제 밤 12시 경 중앙학림의 학생 정병헌(鄭秉憲) ∙ 김상헌(金尙憲) ∙ 오택언(吳澤彦) ∙ 전규현(田奎鉉) ∙ 신상환(申尙煥) ∙ 김법윤(金法允) 외 1명을 불러서 전부를 교부하고 배포할 것을 명하였다.

문:   그날 명월관지점에는 언제쯤 모였던가.

답:   집합시간은 오후 2시부터 모이기로 하였으나 나는 1시 경에 갔었다. 33명 중 3 ∙ 4명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다 모였다.

문:   그때 그대는 연설을 하였다지?

답:   나는 간단히 조선독립선언을 하게 된 것은 기쁜 일이라 하고 그 목적을 달하려면 계속 분려계속(奮勵繼續)하여 운동할 것을 희망한다는 취지로써 인사의 말을 하였다.

문:   선언서의 낭독은 누가 하였는가.

답:   별로 낭독은 하지 않았다. 그때 학생 3명이 와서 선언서 낭독은 많은 사람이 듣기를 원하고 있는 파고다공원에서 하는 것이 지당하다 하므로 우리들은 그런 일은 온당치 못하니 이 점을 잘 생각하여 달라고 하였더니 그 학생은 그러면 당신들이 선언하면 우리들은 외부에서 만세를 부르겠다고 하고 갔다.

문:   선언서의 문면은 누가 지었는가.

답:   누가 제작하였는지 모르나 최린이 담당하였다.

문:   어느 곳에서 인쇄하였는가.

답:   나는 확실히 알지 못하나 보성사에서 인쇄한 줄로 생각한다.

문:   선언은 어떠한 목적으로 하였는가.

답:   독립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지난 27일 일본정부양의회로 조선독립에 관한 통지서를 임규(林圭)라고 하는 사람이 가지고 동경으로 출발하였고 오늘 조선총독부로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문:   운동에 필요한 비용은 어떻게 하였는가.

답:   비용도 들어야 하지마는 내가 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른다. 

                                                                          1919년 3월 1일

문:   일본정부와 제국의회에 제출하였다는 상신서라고 하는 것은 어떤 취지인가.

답:   그 문장은 장문이므로 요약하면, 동양평화는 조선독립이 되고 안 되는데 관계가 크기 때문에 조선이 독립해야 좋겠다고 하였다. 만일 독립이 안되면 도리어 일본이 해를 받을 것인 바 5천 년을 유지하여온 조선민족은 일본과 영원히 동화할 수 없으니 속히 독립을 하는 것이 평화의 제일 조건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많은 조건을 열기하였으며 그것은 일본이나 세계각국은 조선독립이 평화상 필요하다는 것을 게재하였다.

문:   상신서는 누가 지었는가.

답:   나는 모르지만 최린이 알고 있을 것이다.

문:   조선총독에 제출한 것은?

답:   전에 말한 것과 같이 동일한 문귀이다.

문:   그대가 가지고 있는 두 통의 서면은 무엇인가.(이때 압수증 제1호와 제2호를 보임)

답:   그 2통은 2월 28일 오후 2시 경 내가 최린 집에 갔을 때 최는 이것이 초안인데 만일 우리가 경찰에 인치될 때에는 경찰에 제출할 필요가 있으니 이것을 정서하여 달라고 하므로 내가 가지고 있었다. 

                                                                       피고인 ∙ 한용운 

                                                                       1919년 3월 2일 

                                                                       경무 총감부 

                                                                       순경 ∙ 풍원진길(豊原辰吉) 

                                                                       경부 ∙ 한정석(韓定錫) 

                                                                       1919년 3월 11일 

                                                                       경무 총감부에서 

                                                                       검사 ∙ 하촌정영(河村靜永) 

                                                                       서기 ∙ 송본병시(松本兵市)

문:   성명 ∙ 연령 ∙ 주소 ∙ 본적지 ∙ 출생지 ∙ 직업은?

답:   성명 한용운, 연령 41세, 직업 승려, 주소 경성부 계동 43번지, 본적 강원도 양양군 도천면, 출생지 충남 홍성군 홍성면 남문리.

문:   위기 ∙ 훈장을 가졌는가.

답:   없다.

문:   지금까지 형벌에 처한 일은 없는가.

답:   없다.

문:   피고는 금일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려고 한 것이 틀림없는가.

답:   틀림없다.

문:   그러면 그 운동의 전말을 자세히 말하라.

답:   나는 최린과는 친밀한 사이로서 평소부터 서로 왕래하고 있었는데 본년 1월 27일 경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동인의 집으로 찾아가서 잡담 끝에 화두를 고쳐 시세(時世)에 대하여 이야기 하기를, 목하 열국간에 평화회의를 개최 중인데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각 식민지의 민족자결을 허(許)할 것이라는 바 식민지 주민은 독립할 좋은 기회가 되었으므로 각국 영토의 주민은 다 독립을 할 것이고 우리 조선도 민족자결에 의하여 독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니 우리도 운동을 하여서 독립을 하여 보는 것이 어떠냐고 하였다. 그래서 그때 나는 동인에게 독립운동을 하는 데는 적은 수의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될 수 없으니 큰 단체를 조직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하였으며 따라서 천도교는 대단체이니 그대나 천도교 단체에서는 독립운동을 할 의사가 없는가 하고 말했다.

그는 한 사람이라도 그런 의사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내가 천도교인과 의논하여 독립운동할 것을 기도하여 보겠다고 하였다. 그 후 여러 번 만나서 의논하였는데 최린은 천도교에서도 그런 의사가 있으니 힘을 같이 하여 보자고 하였다. 그 후 2월 15일부터 잘 아는 천도교 도사 오세창을 찾아가 동인에게 말했던 것 같은 말을 하였더니 그도 찬성하므로 일을 하기로 하였다. 그 후 각 방면으로 동지를 규합하였는데 그 교섭에 관한 것과 독립운동 실행방법은 전부 최린에게 일임하였다. 그 후 동월 20일 경 최린과 그 실행방법을 의논하였는데 독립운동에 있어서 폭력을 쓰는 것은 도저히 성공할 수 없으니 우리 조선민족의 의사를 중외에 표명함으로써 열국의 성원을 얻을 것이며 또는 일본정부와 동 의회에도 동정을 얻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해서 열국의 성원을 얻고 또 일본의 동정을 얻으면 조선이 민족자결에 의하여 독립이 될 것이므로 이에 대하여 동정을 원하는 뜻에서 서면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그 문서작성과 보내는 일은 전부 최린이 인수하였다.

동월 24일 경 나는 최린의 집으로 찾아가니 그는 이미 독립선언서를 일본정부와 의회 또는 외국에 보낼 서류를 작성하였는데 그 중에서 미국 대통령과 평화회의에 열석한 각국 대사에게 보낼 것은 현순(玄楯)에게 주어 상해로 보내서 그곳에서 전보를 치든지 서류로 보내든지 하기로 하고 일본정부와 의회에 제출할 것은 임규를 동경에 보내서 제출하기로 하였으며 독립선언서는 대표자 연명으로써 인쇄할 것을 말하였다. 그때 동인은 예수교에서도 자기와 교섭하여 합동하게 되었다고 하므로 나는 동인과 같이 예수교인 이승훈과 처음 면회하게 되었고 그때 서로 금번같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라 하고 작별하였다. 그 이튿날로 나는 경상도 해인사의 승려로써 현재 경성 봉익동 1번지에 거주하며 전부터 잘 아는 백용성(白龍成)을 찾아가서 동인과 각 교회가 단체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으니 그대도 참가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하였다.

동인도 찬성하여 가입하였으므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때 동인도 대표자에 가입할 것을 최린에게 통지하였다. 동월 28일 나는 최린에게 가보니 동인은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었다 하고 그것을 경성시내에 배포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고 하면서 그 인쇄물은 이종일 방에 있으니 가지고 가서 배부하라고 하였다. 나는 이종일로부터3천 장을 받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 선언서를 잘 아는 학생들에게 배부할 것을 명할 생각으로 중앙학림 학생 김규현(金圭鉉)에게 오늘밤 학생 몇 사람을 동원하여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하였다. 나는 그날 밤 동지일동이 손병희씨 집에 집합하기로 하였으므로 가서 보니 내일 독립선언서 발표의 방법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는 말이 있었다. 그때 독립선언서 발표는 3월 1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발표하자고 하니 동지 중 박희도가 많은 사람이 모이면 폭동이 있기가 쉬우므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하자 일동은 그 말에 찬성하였다.

그것은 공원에는 학생도 다수 모일 것이요, 또는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도 많을 것이니 그곳에서 우리가 연설하면 경찰이 체포하러 올 것이요, 그렇게 되면 군중들이 경관과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켜 일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니 그 폭동을 피하려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소를 명월관지점으로 변경하여 그곳에서 발표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일은 각자가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하고 곧 산회하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온 즉 중앙학림 학생 김규현 ∙ 김법윤 ∙ 오한현(吳漢鉉) ∙ 정병헌 기타 2인 등 도합 7인이 와서 있으므로 나는 그 독립선언서를 보이고 이것은 우리가 조선독립운동에 관하여 인쇄한 선언서이니 너희들은 이 독립선언서를 시중에 배부하기를 부탁하면서 우리는 내일 오후 2시,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것이니 그 전에 배부하면 안 된다고 말하였다.

또 낮에 배부하다가 폭동이 일어나면 아니 되니 2월 1일 밤에 각호마다 돌리도록 할 것이며 너희들은 그것만 할 것이지 폭동을 일으키면 좋지 못하다고 이르고 천 장 전부를 주었다. 3월 1일 오후 2시 경 나는 명월관지점에 간 즉 손병희, 최린, 오세창이 와있었고 한시 반 경에 대표자 중 4인을 제외하고는 전부 집합하였다. 그때 학생대표자라고 하는 자 2인이 왔었는데 성명이나 소속학교 등은 알지 못한다. 그 학생들은 어째서 일국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데 무슨 일로 공중 앞에서 아니하고 이렇게 비밀히 하느냐 하면서 공원으로 와서 발표하여 달라고 하였으나 우리도 공중 앞에서 발표할 것을 희망하지마는 그러면 폭동이 자연 될 것이요, 폭동이 일어나면 우리는 사업수행에 지장이 있으므로 요구에 응하기 어렵다고 이것을 거절하였다.

오후 2시에 식사가 시작될 때 최린이 나를 보고 간단히 오늘 모이게 된 식사(式辭)를 하라고 하여서 나는「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하여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협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연설하고는 끝으로 각위에 건강을 축원하는 의미로 축배를 들고 만세삼창을 하자고 하였다. 이때 경찰이 와서 우리는 인치되었다.

문:   명월관지점에서 어떤 것을 발표하려고 하였는가.

답:   명월관지점에서는 동지들 뿐이니 특별히 발표할 필요가 없고 또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므로 독립선언서의 낭독여부를 의논한 바 낭독을 하기로 하고 선언서 수 매를 경찰에 보내기로 하여 최린이 인력거꾼을 시켜 선언서를 종로경찰서에 보내게 되었다. 그래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이다. 최초 최린이 나에게 동지끼리만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자고 할 때 자기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려고 하였으나 요새 병기가 있으니 그대가 낭독하여 달라고 하므로 나는 승낙하였다. 그러나 공원에서 발표할 것은 그만 두었다.

문:   피고 등이 금번 독립운동에 학생들과 관계하였는가.

답:   그런 일은 없고 내가 학생을 시켜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게 된 것은 다른 자에게 임금을 주어 배부하려고 하였으나 그 사람이 뒤에 위란이 미칠까 하여 그만두겠다고 할 것 같으므로 내가 잘 아는 학생을 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학생을 시켰다. 나는 다른 학생과는 하등 관계가 없고 또 다른 동지 중에도 학생들과 관계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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