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논단] 한국불교의 교단형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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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논단] 한국불교의 교단형태론
  • 이종익
  • 승인 2009.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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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 릿 말

  교단이란 어떤 교주에 의하여 제시된 교지(敎旨)와 신조(信條)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교도(敎徒)의 집단임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인류란 그 삶의 등뒤에서 검푸른 회색보자기를 둘러쓰고 숨바꼭질 하는 생명의 비밀을 더듬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이지(理智)의 탐조력(探照力)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순간에서 영원을, 그리고 상대 .유한의 세계에서 무한. 절대의 세계를 추구하는 이상의 창조력을 타고 났다.

  그 이지(理智)의 탐조력(探照力)으로 그 삶의 뜻을 캐고 이상의 창조력으로 그 삶의 값을 끊임없이 추구하여 나가는 곳에 여러가지의 종교가 형성되어 나왔다.

  그러한 원리에서 생겨난 종교인데 그러나 그 삶의 뜻과 값을 찾는 방법이 서로 차이가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는 그것을 유한의 인생으로서 무한의 신을 동경하고 그 신의 힘에 의뢰하여 그 목표를 딛고 올라서려 했다. 그것이 기독교나 회회교(回回敎), 인도교(印度敎)와 같은 타력주의 종교이다. 또 다른 종교는 인간 자체 안에서 무한, 절대의 능력을 도달하려 하였다. 이것이 곧 불교와 같은 자력주의 종교이다.

  우선 이 인류사 위의 수많은 종교군을 이 자력, 타력 두 가지로 구분하여 보자. 그런데 사람들은 그 계기에 따라서 혹은 타력주의종교에로, 혹은 자력주의종교에로 말을 돌린다. 그곳에 회회교, 기독교, 인도교, 불교 등의 교단이 탄생되었다. 이것이 이 세계 위에 여러 가지 종교단체가 형성된 근본원칙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교리는 또 분화되어 같은 기독교에도 수십여 파로, 같은 불교에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오늘에 와서는 그 여러 교파가 될 수 있으면 하나에로 통합하자는 운동도 여러차례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에서 그러했고 불교에서도 그러했다.

  그러나 인류란 제각기 제 주관이 있고 아집이 있다. 또는 그에 이해가 결부되어 있으므로 언제나 교단통합이란 공염불이요, 구두선에 그쳤다.

  하물며 「군교통일(群敎統一)」이니 「세계일가(世界一家)」니 하는 것은 꿈이요, 잠꼬대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보고 어떻게 평할 것이며 또는 장차 어떤 방면으로 지양(止揚)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냐에 대한 것을 나의 나름대로 풀이하려 한다. 물론 그것이 본론을 의뢰한 편집자의 요망하는 점과 일치될 수 없지만 (편집자의 요청은 한국불교가 단일종(單一宗)이어야 하나? 분파(分派)이어야 하나?가 주제) 그러나 필자는 이 문제를 불교의 원리면과 역사의 사실 및 현실적 상황으로 이것을 실증하여 그에서 얻어진 사실을 그대로 붓으로 옮기려 한다. 그것이 당위의 요청이나 주관적 욕구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本   論

  1, 원리적 측면에서 

  현재 한국에는 약 20 개의 불교종파가 나열되어 있다. 이러한 종파가 꼭 다 각기 병존해야 될 것인가? 여기에서 그 當然과 不當然性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주관적인 판단이고 객관적인 사실과는 무관하다. 요는 오늘의 역사적 사실임은 틀림없다. 역사적 현실이란 어떤 한 사람의 의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공동연쇄체(共同連鎖體)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 잘 잘못을 사회와 역사의 현실에 물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결론은 끝으로 미루고 우선 불교의 원리면에서 이것을 찾아보기로 하자.

  불교의 원리란 무엇인가? 불교의 근본사상은 어디까지나 참된 자기를 되찾아서 이성의 고향으로 복귀하는데 있다. 것을 「보디(覺)」다, 「닐바나(涅槃)」다, 또는 「해탈(解脫)」이다. 「피안(彼岸)의 세계」라고 하였다.

  붓다의 가르침은 그것뿐이다. 그런데 그 가르침을 전개하는 방법은 이른바 여러 가지 방편문을 쓰게 되었다. 그 가장 드러난 예로서 가장 초보적인 입교자(入敎者)에게는 「삼귀의」와 「오계」를 가르쳐 주었다. 그 다음에는 십선법(十善法)같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한 교지(敎旨)는 뒤에 「인천인과교(人天因果敎)」라고 하였다.

  그 다음에 이 세간을 아주 뛰어나서 모든 번뇌를 끊고 생사를 벗어나겠다는 교도를 위하여서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라는 사제(四諦)의 진리를 가르쳐 주어 그 이치를 깨닫고 도를 닦아 번뇌가 끊어진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그것을 「아라한」이라고 하며 또는 「성문승(聲聞乘)」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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