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논단] 현대구미문학에 있어서의 선사상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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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논단] 현대구미문학에 있어서의 선사상 (完)
  • 김현장
  • 승인 2008.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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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논단

  이오네스코와 선

  이오네스코(Eugene Ionesco)의 선사상 수용태도는 직선적이고 정면 공격형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모르는 한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지식이란 아무 뜻이 없음을 철저히 깨닫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문학을 부정하고 언어를 부정하게 된다. 비록 말년의 일이지만, 또한 이오네스코는 선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개오(開梧)의 문제로 하여 많은 노력과 고심을 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의 《조각일기》(Journal en mietles: Mercure de France)에는 이러한 선적인 체험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오네스코는 이미 18세때에 겪은 선에서 말하는 오(悟)와 유사한 어떤 황홀경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향의 소읍에서 산책을 하고있던 어느날 나는 급작스런 황홀경에 빠졌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집들은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고 이 눈부신 광명속에서 전연 새롭고도 천연적인 미지의 세계가 나타날 때 나는 깊은 내면으로 부터 솟아오르는 환희를 맛보았다. 이 환희는 뜨겁게 빛을 발하며 절대적인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바로 진리 그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오네스코는 이 체험을 통하여 생의 불멸을 깨달았고 그 후에 닥쳐오는 모든 생의 근심과 고뇌는 이 체험만을 상기함으로써 극복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체험의 기억은 점점 사라져 가고, 본질의 영상도 멀어져 감을 그는 깨달았다. 『결국 찬란한 광명속의 오도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부족하였다. 난 그것이 본질적인 것의 체험으로 알았으나 본질의 본질은 거기에 없었다.』

『사람의 지식이란 그 사람이 알고 있는 바를 뜻한다. 그러나 지식의 소유자인 나에 관한 지식이 없다면 사람의 지식이란 파탄을 면키 어려울 것』이라고 『칼 융』은 말한 적이 있다. 융의 말은 자아에 관한 지식은 다른 모든 류의 지식에 선행해야 한다는 선의 가르침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뿐이다. 그런데 이오네스코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일생을 통하여 희곡을 쓰면서 소위 문학이라는 것을 해왔다. 그러나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면 나는 무엇때문에 문학을 위하여 그리 많은 고초를 겪어야 했단 말인가? 이런 의문은 자연 나에 대한 탐구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나 자신을 알고 싶은 이 격렬한 마음, 더 일찌기 이 마음을 가졌어야 했다. 제때에만 이런 생각을 했어도 무엇인가는 이룩했을 것이다. 문학으로 인하여 얼마나 무고한 시간을 잃고 낭비했는가. 나는 시간을 충분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젠 정말 급박하다. 이것이 마지막 순간이다. 허나 이 초조함은 깨우침에 큰 장애인데……』 견성을 못하는 데에 대한 이오네스코의 초조감과 절망, 그리고 비관은 큰 것이다. 그는 깊이 통찰하지도 않고 모든 상징을 고갈시킨 것을 한탄하면서 문학으로 인하여 깨침을 얻지 못하였음을 분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의 절실한 해탈의 원은 다음 글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내 앞에 있는 무한한 절벽, 등반하기가 전혀 불가능한 절벽이 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이 거대한 절벽. 오늘은 더욱 더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나의 의무는 이 절벽을 넘든지 혹은 절벽을 뚫고라도 통과하는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오네스코는 문학을 부정하고 있다. 즉 자기를 모르고는 문학에 아무런 뜻도 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문학이나 예술이 견성해탈을 가져올 수 없다고 확신을 하고 있다. 『아더 랭보』(Arther Rimbaud)는 공연스리 《각(覺)》(Illuminations)이란 저서를 남겨 놓았고 사람들은 헛되이 그를 도인이라 불렀다. 문학을 통하여는 어떠한 돈오도 있을 수 없다. 문학은 수다와 객설에 빠져 깨달음의 조그만 시초만 가져다 줄 뿐이다.

  문학의 부정은 언어의 부정을 유도한다. 물론 언어의 부정은 새로운 언어의 긍정을 가져오는 것이지만 깊은 체험은 이를 설명할 말이 없다. 설명하면 할수록 이해는 더욱더 희미해진다. 모든 것이 언어로써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생동하는 진리는 더욱 그렇다.

『한 단어는 당신을 도에 이르게 할 수 있다.

  둘째 단어는 당신을 어지럽게 하고

  세째 단어는 당신을 공포속에 몰아넣는다.

  네째 단어 이후에는 완벽한 「카오스」만이 있을뿐이다.

 「로고스」도 행동이었다.』

  이상 본바에 의하면 이오네스코는 선의 핵심이 어디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견성을 약속해 주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이오네스코의 고민이 있고 인간적인 발버둥침이 있고 절규가 있는 것이다.

『등반이 불가능한 거대한 절벽』앞에서 이오네스코의 절망은 선객이면 누구나 다 거쳐야 하는 관문인 것이다.

  다다, 초현실주의와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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