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의 성좌] 9.함허득통선사(涵虛得通禪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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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의 성좌] 9.함허득통선사(涵虛得通禪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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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8.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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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의 성좌 9

  이 태조가 고려조의 유습을 계승하여 불사를 존중하였지만 태종, 정종을 지내오면서 불교를 배척하고 불교교세를 압박하여 불교는 큰 시련을 겪는다. 함허선사는 이런 때에 나서서 현풍을 진작하고 이조불교의 기초를 굳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1. 출생과 그 시대

  함허선사는 고려말(우왕 2년, 서기 1326)에 지금의 충주에서 태어났다. 선사의 문인 야부가 지은 함허화상행장에서는 함허스님의 생애가 자세히 보인다. 「함허」는 스님이 머물었던 당의 이름이고 스님의 이름은 기화, 호는 득통, 송성은 유씨였다. 어머니 방씨는 아기가 없어 관음보살께 기도했더니 꿈에 성인이 아기를 안고 와서 주더라고 한다.

  그때는 선왕 공민왕이 2년 전에 살해되었고 신왕 우왕은 12세. 사뭇 선대 이전부터 창궐했던 왜구는 더욱 격화하였다. 이태조가 고려왕조의 문을 닫은 것이 함허선사 십칠세 때다. 선사는 태종, 정종 대를 거쳐 세종 15년에 입적한다. 태종 대에 종래의 불교 11종을 7종으로 폐합하더니 세종 대에 이르러 이를 다신 선교 양종으로 폐합하였다. 유생은 불교를 질시하여 고승을 죽이고자 하고 배불의 기세는 나날이 기승을 부리던 그 당시 현풍을 진작하여 조도를 중천한 것이 함허득통선사다.

  2. 출가 수학 오도

  선사는 일찌기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는데 뛰어난 자질을 촉망받았다. 21세에 벗이 죽는 것을 보고 세간무상을 느끼고는 생사해탈을 구할 뜻을 내어 마침내 1396년 관악산 의상암에 이르러 축발했다. 다음 해, 양주 회암사에 이르러 무학존자를 찾아 법요를 듣고 그 후는 제방을 유력하면서 오로지 근수 정진하였다.     태종 4년 회암사에 돌아와 한 방에 틀아앉아 거래 시청을 끊고 정좌하더니 드디어 홀연히 깨치고는 『걸음마다 홀연히 고개돌리니 봉우리는 구름 속에 솟아 있구나.』 하고 『이 한 사실뿐이다. 다시 또 있다면 그것은 허망한 것.』이라 하였다. 그 뒤 2년이 지나 대승사에서 4년동안 머물면서 반야경을 강하였고 그 후는 관음굴, 불선사, 인봉사 등에서 조풍을 드날리고 크게 교화하였다. 함허당은 연봉사에 있던 한 당에 붙인 이름이다. 이때 선사의 도명을 크게 떨쳤다. 선사 45세때 오대산에 이르러 공양하고 나옹선사의 영을 예천하였더니 그날 밤 꿈에 신승이 나타나 말하기를 「스님의 이름은 기화, 호는 득통이라 하시오」한다. 그때까지의 이름은 수이, 호는 무준이라 했었다. 꿈을 깨고 나니 신기가 상쾌하여 허공에 오른듯 하였다고 한다. 그때는 세종 2년이었다. 세종대왕은 선사를 왕실 원당인 개성 대자사에 머물게 하고 선비의 추천법회를 청하였다. 종실, 왕자, 부마, 대군 등이 향을 받들고 법을 청하였던 것이다. 선사의 현묘한 설법에는 열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4년이 지나 사퇴하고, 선사 48세 이후는 제산을 두루 다니며 인연따라 교화하였다. 하루는 교법을 진작하여 불일(佛日)을 다시 빛나게 하리라 생각하고 선사 56세 되는 세종 13년 화양산 봉암사에 들어갔다. 사우를 준수하고 크게 흥법할 것을 기약하더니 58세가 되는 4월 1일 암연히 떠나셨다. 임종에 이르러 탁연히 정좌하여 이르기를 『맑고 공적하여 한 물건 없고, 신령한 빛 밝고 밝아 시방에 사무쳤네. 다시는 생사를 받음이 없으니 거래 왕복에 걸림없어라.』 하였다. 선사의 저서는 퍽 많다. 어록 외에 원각경소ㆍ금강반야경오가설의ㆍ현정론 그 밖에 여럿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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