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논단] 고려불교의 중흥과 진각국사 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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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논단] 고려불교의 중흥과 진각국사 혜심
  • 민현구
  • 승인 2008.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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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一.

   호남의 수도 광주에서 남으로 여주, 영남을 거쳐 당진군의 관내에 접어들면 곧장 월출산의 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월남이라는 아담한 마을에 당도하게 된다.  이 마을 한 가운데에는 모비 석탑이 있고 좀 떨어진 옆에는 일부가 크게 부서져 나간 석비가 있다.  이 유물들은 옛날 월남사에 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 월남사가 폐사된 지 오래인 오늘날에는 정확한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채 무심히 버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 서 있는 비의 주인공이야말로 고려 전시대를 통하여 빼어난 고승 가운데 한 분으로서, 보조국사지눌에 이어 조계산 송광사의 제2세 주지가 되어 고려불교의 발전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진각국사 혜심임을 알게 된다면, 누구나 옷깃을 여미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바로 그 진각국사 혜심(1178 ~1234)을 중심으로 해서 당시 고려 불교의 사정을 살피고, 이를 통하여 참다운 불교의 발전의 생생한 현장을 목도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二.

   고려  의종 23년 (1170) 의 무신란은 고려사회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온 획기적 사건이었다.  무신들이 쿠테타로 정권을 잡고 문신들을 모조리 죽이고, 왕을 폐위시켰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전국 각지에서는 노비와 농민의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고려사회는 큰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문신 중심의 고려 귀족사회 속에 누적되었던 모순이 이같은 큰 변화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무신란이 일어나면서 불교계도 크게 소용돌이치게 되었다. 

명종 4년 (1174년)에는 귀법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의 승려들 2000여명이 당시 무신정권의 유력자였던 이의방 형제를 타도하려고 모여들었다가 실패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었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의방은 중광사, 홍호사, 귀법사, 용흥사, 묘지사, 복흥사 등 개경에 있는 큰 사찰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그 후 고종 4년 (1217)에도 흥왕사, 홍원사, 경복사, 왕륜사, 안양사, 수리사 등의 많은 승려들이 무장을 하고 당시의 무신 집권자 최충헌을 제거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최충헌의 사병에게 패퇴당하여 800여명의 죽음을 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그 밖에도, 높은 법계를 지닌 승려들이 유배를 당하는 등 여러 사건들이 이 무렵의 불교계를 뒤흔들곤 했다.  아뭏든 무신란 이후, 고려 불교계는 큰 혼란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상황은 당시 불교가 고려의 정치 사회와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야기된 것이었다.  고려사회를 지배해 온 것은 문신귀족이었는데, 불교는 이들과 굳게 결탁되어 있었다.  고려에서 불교는 국교로서 존중되었더랬고, 많은 사람들의 귀의를 받았지만, 왕공귀적들의 우월한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이 불교계를 침식하여 들어갔고, 마침내는 불교가 귀족정치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대신, 사원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고리대를 하는 막강한 경제력을 갖추고 정치에도 관련을 갖는 존재로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 귀족정치의 모순이 축적됨에 따라, 불교계의 타락도 심해졌으며, 무신란으로 문신중심의 귀족정치가 깨어지자 이들과 공생관계에 있던 불교계는 일종의 자존책으로 무신정권과 대결하였으며, 이러한 가운데 많은 혼란이 생겼던 것이다.  당시 고려 불교가 겪은 혼란은 더 근본적으로 내면적인 사상적 빈곤에 기인하는 바 컸다.  고려 불교는 신라 하대 선종 수용의 기반을 계승하고,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종 개종을 경험하는 가운데 큰 발전을 이룩하였지만, 대체로 이론적 빈곤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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