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선의 실천 : 화두話頭
상태바
[특집] 선의 실천 : 화두話頭
  • 관리자
  • 승인 2008.01.1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禪의 實踐

① 見性이라는 것

   이설은 있어도 달마(達摩)대사 지음이라고 알려지고 있는 혈맥론(血脈論)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부처를 찾고자 하거든 반드시 견성하여야하니 견성하면 곧 불이니라. 만약 견성하지 못하였으면 염불하거나 경을 읽거나 재계(齋戒)를 갖더라도 이익이 없나니, 염불하면 인과를 얻고 경을 외우면 총명을 얻고 계를 가지면 천상에 나며 보시를 하면 복된 과보를 얻으나 부처를 찾는 데는 마침내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자기를 밝게 요달하지 못하였거든 마땅히 선지식에 참례하여 생사근본을 요달하여야 하느니라...... 만약 견성하였으면 곧 불이요, 견성하지 못하였으면 즉시 중생이라」하였으며, 또 六조 혜능(慧能)대사의 법보단경(法寶壇經)에는 일관하여 견성을 논했고 「만약 자성을 한번 깨달으면 곧 불지(佛地)에 이른다」하고 있다.

 위 두 조사의 말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교는 인인개개 자기 본성을 보아 필경 자타 유무 생사 인과의 상대(相對)와 관계 조건에서 벗어난 훤출한 자기면목의 확인을 제一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염불을 하고 경을 외우고 이론적 지식을 연마하고 선행을 행하는 것이 필경 자기본성을 드러내는 조건임에 그치고 본성 자체를 직접 파악하는 도리와는 사뭇 거리가 있는 것이다. 이래서 교학 연구의 기초가 되는 일체경전은 필경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은 일체경전을 설하신 주체, 즉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은 일체경전을 설하신 주체, 즉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교학을 배웠거나 어느 누구의 은혜로운 선물을 받아서 성불한 것은 아니다. 오직 본성을 요달하여 불성을 확인하고 불성인 자성을 열어보이며 내지 우리에게 그를 가르치셨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떤 번쇄한 이론도 조리도 없는 것이다. 오직 단번에 근원에 도달하여 인간본지(本地)를 체득하는 것일 요구한다.

 

   ② 선의 본질과 발달

   선은 근원적 실제(實際)의 체득이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선의 시초는 역사상 최초의 각자(覺者)인 부처님에게도 거슬러 올라갈 수 밖에 없다. 비록 선이라는 언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론과 사유를 초절(超絶)하여 자성본지(自性本地)를 사무쳐 대도를 성취한 모든 성자들은 선에 의하여 깨달았다 할 것이며, 또한 깨달은 참된 경지를 쓰고 말하고 행한 그 모두는 바로 선의 활용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바꿔말해서 선은 필경 근원적 실제인 불성, 즉 본래면목의 직접적인 확인방법이 그것이며 동시에 그러한 본래면목의 구김없는 발휘가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체중생이 중생된 원인은 앞서 달마대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참된 자기를 상실한 데에 기인한다. 상실한다 하지만 실로 어디 간 것이 아니다. 자기 존재 자체가 바로 진면목의 실존인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자기 진면목을 모른단 말인가. 그것은 망념(忘念)으로 인한 착각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자기 진면목을 깨닫고저 하면 두가지 경로가 있게 된다. 하나는 망념을 쉬는 것이요, 또하나는 착각된 눈길을 바로잡는 일이다.

 기본적인 것으로는 사마타(奢摩他)다. 사마타는 원각경(圓覺經)에 보이는 바와 같이 무엇보다 지극히 고요한데 이르러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 이와같이 하여 고요가 극치에 이르면 마침내 깨닫는 것이니 망념이 다하면 즉시 자성을 얻는 것이다. 이 법은 고래로 인도에서나 중국에서나 일반적으로 쓰여온 기본방식이니 묵조선(默照禪)도 이 계보에 속하는 것이다.

 둘째는 망념의 유무에 상관하지 아니하고 오직 성품을 보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생각을 헛된 곳에 헛되게 맡겨두지 않고 오직 분명히 자기자신을 보게 한다. 이 자성을 보게 하는 방법으로 주어진 무기가 곧 화두다. 화두는 자기본분을 직접 보는 작업이다. 앉는 데 있지 않고 눕는데 있지 않고 동요가운데 있지 않다. 오직 주어진 본분도구(本分道具)인 화두에 몰입하여 한눈 팔지 않고 곧바로 보아간다. 여기서 본분면목을 보게 되는 것이니 그것은 허둥대던 마음의 눈을 돌이켜 자기본지에로 돌리는 것이다. 이것이 착각의 눈을 돌이킨 것이며 자기본분을 본 것이니 곧 견성이다. 이 두 번째 방법은 세존당시부터 실지 행하여 왔지만 공부법으로 정형화한 것은 선이 사뭇 발달된 이후에 성행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사리를 보아도 당연하고 선의 역사가 또한 그러하다.

 

   ③ 화두의 의미와 시작

   위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화두가 착각된 마음의 눈을 자기본분으로 돌이키는 기장(器杖)이라면 부처님 당시 수많은 제자에게 이 화두방식이 실시되었을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세존이 도솔천을 여의지 아니하고 왕궁에 강탄하시고 모태(母胎)에서 나오기 전에 중생을 제도하였다든가, 세존이 샛별을 보고 오도하셨다던가, 이른바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고 하는 다자탑 앞에서 가섭과 더불어 자리를 나누시기도 하고 영산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셨던가 또 오동꽃 두그루를 들고 온 흑시범지(黑氏梵志)에게 세 번이나 「놓아라」하셨다던가 한 이 모두는 바로 화두적인 시설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실지 이 말 아래서 무수한 각자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