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불교윤리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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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불교윤리의 본질
  • 홍정식
  • 승인 2008.01.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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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

 

1

 「諸惡慕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이는 七佛通戒로써 널리 알려진 게송이다.  칠불통계라 함은 어느 일불의 수계가 아니고 칠불의 공통적인 교계라는 말이다.  일불의 교계가 아니고 칠불에 공통되는 교계라 함은 어느 일시에나 일지역에 국한되는 특수한 교계가 아니고 고금동서의 제한을 받지 않는 불변의 교계라는 의미로 파악하여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칠불통계는 불교의 인간행위의 근본원칙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는 불교윤리의 에센스를 언표(言表)한 겅이라 하여 좋을 것이다.  팔만사천으로 헤아려지는 불타교설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생활의 향상과 완성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없는 일이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는 선악 두가지로 나눌 수 있겠는데 선은 인간생활의 향상과 완성에 부응하는 것이며 악은 선과는 달리 인간생활의 향상과 완성을 저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칠불통계에 있어서 선의 봉행이 권장되고 이에 반하여 악은 행하여지지 아니할 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불교윤리는 일반윤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어떤 것을 선이라하고 어떤 것을 악이라 하는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특히 선과 악을 판별하는 기반에 있어서는 양자는 반드시 동일한 거은 아니다.  칠불통계의 제3구 「自淨基意」는 불교윤리에 있어서의 선악을 판별하는 기반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불교윤리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일반윤리의 선악관은 다분히 자기를 중심으로 한 타산적인 경향이 농후함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선을 불교에서는 「有所得의 善」또는 「有漏의 善」이라고 일컫는다.  유루라는 말은 번뇌가 완전히 끊어지지 못한 상태, 즉 마음이 청정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므로「自淨基意」를 기반으로 하는 칠불통계의 선, 즉 불교의 선과는 상이하다.  이에 비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선은「무소득의 선」또는 「無漏의 善」이라고 일컫는다.  일반윤리의 선이 인간번뇌를 긍정하고 있음에 대하여 불교윤리의 선은 인간번뇌와의 타협을 배제하고 스스로 마음을 맑게하는 청정심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윤리의 선은 일체의 무명, 또는 번뇌와 타협을 거부하고 직접 우주질서 즉 진리인 법과의 대면에서 이루어지는 선임을 거의 본질로 한다.  大乘意章에「順理名善 違理名惡」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순리와 위리의 이는 법이다.  정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선과 악의 분별은 정법과의 대면에서 순하고 위함에 따라 판별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법은 자기중심적인 아집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정법에 수순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아칩을 벗어난 청정심인 경우에만 가능할 수 밖에 없다.  청정심을 가진 자야만 비로소 선행이 가능하게 된다.  불교유리의 본질적 근거는 결국 정법에 수순하는 마음, 즉 청정심에 귀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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